난 20세기(!)에 대학교에 입학했으니, 당시에는 합격증과 함께 등록금 고지서 종이가 일일이 따라나오는 수준이었다 (21세기 대학원에 입학해보니 모든 것이 종이 한 장 없이 웹상에서 끝남). 등록금은 아마도 부모님이 이체하셨겠지만, 그 줄줄이 따라나온 납부 지로 용지들 중에 '문과대 학생회비'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이것을 반드시 내야하는 줄 알고 학교 은행에 가서 "거금" 5-6만원 정도를 직접 창구 납부했다.
그때 갑자기 웬 남자 한 명이 그 납부 영수증을 잠깐 볼 수 없냐고 하면서 다가왔다. 역시 순진한 나는 종이를 내주었고 그 사람은 그 종이를 관찰하고 다시 돌려주고는 사라졌나...암튼 후일담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우리과의 학생회장이었던 3학년 선배였고, 나중에 더 알고 보니 총학생회비도 아니고 '문과대 학생회비' 따위를 내는 순진한 학생은 우리 반 학생 60여명 중 한 자리 수에 수렴했다. 그 사람은 아마 조악했던 문과대 학생회비 청구서와 영수증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기 위해 은행에 죽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1학년 때 우울함에 빠져 신입생 수련회도 생략하고, 과방에도 안 가고.... 그래서 선배들을 잘 모르고, 선배들에게 별로 밥을 얻어먹지도 못했다. 나중에 2학년이 되어서야 우울함을 좀 벗고 사람들과 많이 친해지고, 3학년-4학년 때는 (이른바 '비운동권') 학과 학생회장 선거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었다. 절친과 절친한 후배가 차례로 회장으로 나섰었기 때문에... 그러면서 '내부자'가 되어보니, 의무가 아닌 문과대 학생회비 납부율은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학년 때 맘을 닫고 살아서 선배들에게 밥도 별로 얻어먹지 못한 내가 아무도 안 내는 학생회비를 혼자 내서 남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ㅎ.
아무튼, 그렇게 멋모르고 돈을 지출하던 나에게 다가와 영수증 좀 보고 싶다고 했던 그 학생회장 오빠를 나는 별로 맘에 안 들어했던 듯하다. 문과대 학생회가 나에게 해주는 것 하나도 없는데, 돈 내지 말라고 좀 말리지.... 그리고 그 촐싹대고 가벼운 듯한 이미지...
내가 입학하기 전해에 우리 학교는 대규모 교내 점거 시위, 그리고 교외 시위 중 학생 1명 사망의 여파가 쓸고 지나간 후였다. 지금은 취업 준비로 점철된 대학 생활이지만 그때만 해도 여전히 학교에는 NL이니 PD니 하며 정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500명이 입학한 인문학부 학생이었지만, 입학시험 수험 번호순으로 1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ㅎ로 시작하는 내 성씨 때문에 1반에서 밀려나와 필수 교양 수업은 4반으로 배정된 생활 속에서, 가나다순으로 같이 밀려나와 필수 교양을 듣는 1반 친구들과 그나마 친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여자아이 H는 그 학생회장 오빠를 따라 교내 집회 등에 열심히 참석했다. 말끝마다 "XX오빠가...., XX오빠가..."를 언급하면서...
음, 저렇게 영향받는 친구도 있구나.
그러던 가을, 대규모 학교 축제가 열렸고, 과 깃발을 가운데 두고 우리 과가 둥그렇게 모였다. '아웃사이더'이던 나조차도 그 행사가 궁금해 결국 참석했을 정도의 유명한 행사다. 그 학생회장 오빠가 밖에서 부터 달려와 학생들 원 한가운데 과 깃발을 쿵 찍으면서 학교 구호를 외쳤다. 그 순간 내 눈에 H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 오빠를 지켜보며 너무 기뻐하며 웃던 그 모습에서, 그 딱 표정 그거 하나에서 H가 그 오빠를 이성으로서 좋아? 연모?한다는 느낌이 확 왔다. 그전까지는 그 정도로 좋아하는지 잘 몰랐었다. 그날은 즐거운 날이라 다들 헤프게 웃고 있었지만 그애의 웃음은 달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신기한 순간이다. 뭔가가 훅 하고 흘러나왔었다. 수십 명의 과 사람들이 크게 원을 만들어서 내 반대편에 H가 서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문과대는 원래 '여초'라서 수많은 여자애들이 서서 웃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친구의 두드러지는 '행복해 함'이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렇게 티가 나는 일이었구나....
H본인이 나에게 짝사랑 상담을 해오지 않는 이상 뭐 내가 추궁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은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겨울이 되어가던 어느 날 그 학생회장 오빠의 생일날 H가 술에 취해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오빠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나는 H의 표정, 뭔가의 기운에서 그걸 미리 알았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학생회장 오빠는 진작에 비밀 여자친구가 있었고, 다음해 초가 되어서야 심지어 우리랑 같은 반 같은 학번이었던 여자친구를 공개했다. 그뒤 H는 마음을 어찌어찌 정리했고, 다른 동기랑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뭐 여기 얽힌 3명 모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가끔 사람들의 기운이나 마음, 기가 공중에 훌훌 날아다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몇몇 신기한 순간들.
그러던 가을, 대규모 학교 축제가 열렸고, 과 깃발을 가운데 두고 우리 과가 둥그렇게 모였다. '아웃사이더'이던 나조차도 그 행사가 궁금해 결국 참석했을 정도의 유명한 행사다. 그 학생회장 오빠가 밖에서 부터 달려와 학생들 원 한가운데 과 깃발을 쿵 찍으면서 학교 구호를 외쳤다. 그 순간 내 눈에 H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 오빠를 지켜보며 너무 기뻐하며 웃던 그 모습에서, 그 딱 표정 그거 하나에서 H가 그 오빠를 이성으로서 좋아? 연모?한다는 느낌이 확 왔다. 그전까지는 그 정도로 좋아하는지 잘 몰랐었다. 그날은 즐거운 날이라 다들 헤프게 웃고 있었지만 그애의 웃음은 달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신기한 순간이다. 뭔가가 훅 하고 흘러나왔었다. 수십 명의 과 사람들이 크게 원을 만들어서 내 반대편에 H가 서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문과대는 원래 '여초'라서 수많은 여자애들이 서서 웃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친구의 두드러지는 '행복해 함'이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렇게 티가 나는 일이었구나....
H본인이 나에게 짝사랑 상담을 해오지 않는 이상 뭐 내가 추궁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은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겨울이 되어가던 어느 날 그 학생회장 오빠의 생일날 H가 술에 취해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오빠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나는 H의 표정, 뭔가의 기운에서 그걸 미리 알았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학생회장 오빠는 진작에 비밀 여자친구가 있었고, 다음해 초가 되어서야 심지어 우리랑 같은 반 같은 학번이었던 여자친구를 공개했다. 그뒤 H는 마음을 어찌어찌 정리했고, 다른 동기랑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뭐 여기 얽힌 3명 모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가끔 사람들의 기운이나 마음, 기가 공중에 훌훌 날아다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몇몇 신기한 순간들.
모두들 정작 중요한 것은 알지 못해 고생하지만, 그래도 어떤 '기'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도 눈치 챌 정도로 '뿜뿜'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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