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력을 시험하다




2007.03.12 13:01 


우리 집 5명 중에서 유일하게(!) 연애질 잘하는 남동생.
대학교 1학년 때 두 학번 위의 누나를 집에 데려오는 공개 연애를 하다가 (난 울집 거실에서 그녀와 같이 밥먹은 적 있음) 뭔가 단점을 깨달았는지, 이후엔 철저한 비공개 연애로 돌아섰다.
 
나와 내 남동생은 싸이월드 1촌이 아닌지라, 어쩌다 한 번 서로 홈피에 왕래하는 정도라서 05학번 요즘 여자친구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가끔 가보는 동생 홈피에서 느끼는 건, 어린 그녀가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는 거. 그녀의 글은 모두 이런 식이다.
 
"대문 사진 맘에 안 들어 바꿔"
"저 사진 맘에 든다. 저거 대문에 올리라니깐"
"일촌명 이상하네. 바꿔."
번듯한 외모 때문에 그래도 인기남인 내 동생을 자신이 지배하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도 내가 장동건 여자 친구라면 대중 앞에서 그가 내 말을 잘 듣는 남자임을 과시하고 싶을 것 같다. 쿠쿠
 
 
 
어제 밤에는 밀란 더비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serie A 중계를 시작한 첫 시즌이기 때문에 밀란 더비를 시청한 것은 이번 시즌이 처음이었지만, 내가 본 두 번 모두 근사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AC밀란 팬인 내 동생은 거실에서 축구를 조금 보다가 여자친구의 유선 전화에 호출당해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멋진 장면을 본 내가 감탄사를 연발할 때마다 동생은 전화하다 말고 방에서 뛰쳐나와서 스코어를 살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분명한 신호였다. '여친, 난 솔직히 축구보고 싶다. 전화 좀 끊자'
 
그러나 내 생각에 그녀는 자신이 축구보다 후순위에 위치하는 것을 거부한 것 같았다. 동생은 계속 전화에 붙잡혀 자기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반전 40분쯤 호나우두가 골을 넣었을 때 내가 두 번이나 "호나우두가 골 넣었어!"라고 외쳤지만 동생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같은 학교, 같은 과라서 다음날 아침이면 만날 수 있는 그들이 구태여 늦은 밤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있을 이유는 없다. 내가 보기엔 확실히 여자친구가 자신의 지배력을 시험하고 싶었던 것 같다.
 
후반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온 동생은 KBS가 전반전 리플레이를 안 해 주는 바람에 호나우두의 골 장면을 끝내 볼 수 없었다. 모든 중계가 끝나고 동생은 kbs를 욕하며 자기 방으로 사라졌지만 여자친구에 대한 원망도 살짝 섞였으리라.
 
 
 
많은 인간관계가 '우선 순위'때문에 충돌이 일어난다. 약속이 어그러지거나 믿음을 저버렸을 때, '내가 그것보다 중요치 않단 말이야? 내가 그것보다 못하단 말이야?' 이런 사실에 화가 난다.
 
내가 꿈꾸는 연애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믿고, 배려해서 지배력을 시험하지 않으려는 연애이다. 상대편이 축구 팬인데, 축구 팬에게 밀란 더비를 본다는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한다면, 아무리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잠시 양보해주는 식으로. 
 
상대편이 지금 내 전화를 거부한다고 해서 내가 영원히 후순위로 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축구가 중요하지만 그것만 끝나면 내가 당연히 1순위로 복귀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관계.
 
하지만 이건 머리 속에서나 가능할 일일지도.
언젠가 나도 이런 말을 할지 몰라.
 
 
 
 
"죽을래?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내가 중요해, 축구가 중요해?"   

댓글1

  1. ㅅㅎ진
    정말 공감...우선순위 시험은 상대방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자기 사랑이지. 그래도 결국 그리되는 인간상...ㅋㅋ
    2007.03.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