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에서 충수염 수술 받기 Appendectomy in Sri Lanka

"스리랑카에서 수술 받기"

--------- 내 인생의 unique(?)한 순간?!?!
이 사실은 내가 한국에 와서 엄마를 만나기 전까지는 "embargo"였던 사항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추억으로 남기기 위해 더 잊혀지기 전에 글로 남긴다---------


2009년 6월 16일 화요일.
캘러니야 대학교는 학생과 동네 주민의 패싸움으로 11일부터 다시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 상태.
오전에 학교에 출근해서 싸이질 좀 하고,
학생을 한국에 유학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이곳저곳 연락해보고...
유학에 대해서 학교 선생님 간에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잔소리 좀 듣고 나서
콜롬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노트북을 짊어지고 커피빈에 가기 위해 120번 버스를 탄지 얼마 되지 않아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의 통증.
'이거 이상하네...갑자기 왜 아프지?
신경성인가? 오전에 잔소리 좀 들었다고...'

오후에 커피빈에 도착해서도 배가 계속 아팠다.
평소에 자주 하는 설사 때문인가 하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딸린 짐이 많아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경찬이와 미영이가 와서 자리를 지켜주었고, 나는 화장실에 갔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계속 배는 살살 아프고,
나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미영이와 경찬이에게
"이상하다..나 이런 식으로 배 아픈 적 없는데...이상하다.."
이런 말만 계속 했다.

하지만 딱히 아주 심한 통증도 아니었기에 친구들을 따라 백화점에도 갔다.
백화점에 가니 왠지 몸이 피곤하고 미열이나 오한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친구들과 헤어져 버스를 탔는데 너무나 몸이 피곤했다.
도저히 서서 버스를 타고 갈 수가 없어서 중간에 내려서 three wheeler를 탔다.

집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해지려 하는데, 확실히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열을 재보니 37도 훌쩍 넘는 정도.
아무래도 이상해서 한국의 의사 친구에게 전화하려 하니, 설상가상 잔액도 없다.
친한 단원에게 통화 잔액을 넘겨받아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의사 친구는 어느 부분이 아프냐며 배를 눌러보라고 했다.
친구가 오른쪽 아랫 부분이 어떻냐고 물어보는 순간 나는 그 부분을 누르고 있었는데
통증이 느껴졌다.
"그럼 맹장염일 가능성이 있는데..."
아...
맹장염...
말로만 듣던...
여기는 한국도 아니고 스리랑카.
과연 내가 수술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른 친구에게 듣던 것보다 통증이 심하지가 않아서 반신반의하며 그냥 집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에 혼자 있기가 두려워서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적어도 종합병원 근처에라도 가 있으려고 한 것이었다.

맹장염일 가능성을 내심 억누르면서도
거의 3박 4일 분량의 옷들과 속옷, 화장품들을 가방에 집어넣었고...
입원할 가능성을 머리 속에 넣고, 퇴원할 때 친구들이 집에 같이 올 것이기 때문에 그 와중에 집 청소를 했다.
아픔보다 체면이 우선한다?!?!

그리고 van을 불러 콜롬보로 출발했다.
콜롬보에 사는 미영이도 전화 안 받고,
유숙소에 있는 경찬이도 전화 안 받고,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과장님도 전화 안 받고,
병원 근처에 사는 수강 언니도 전화 안 받고....
대체 van은 출발했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따라 신규단원 20명이 유숙소에서 현지적응훈련중이라 빈방이 없다시피 해서 유숙소로 갈 수도 없었다.

결국은 응급실에 가기 위해 아폴로 병원에 가자고 했다.
병원 근처에 왔을 때쯤 수강언니가 병원으로 오겠다는 전화가 왔다.
응급실에 가니 젊은 여자 의사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배에 tension이 느껴진다고 계속 이야기했지만
열이 좀 있으니까 의사는 flu라고 주장했다.
약을 몇 개 처방하고는 3일이 지나도 열이 안 떨어지면 피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나로서도 복통이 매우 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물러나 약국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수강언니가 오고, 나는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했다.
배가 땡겨서 허리를 펼 수가 없어서 구부정하게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강언니가 다시 가서 말해보자고 했다.
다시 응급실에 가서 아무래도 복통이 심하다고, 맹장염은 아니냐고 했다.
그제서야 여의사가 침대 위에 누워보란다.
여기저기 눌러보더니, 그녀도 약간 맹장염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피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때가 오후 아홉시쯤 되었는데
의사가 초음파 진단을 하는 사람이 모두 퇴근했다며 니가 진짜 많이 아프면 불러서 진단을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약을 받아들고 병원에서 그나마 가까운 수강언니 집으로 왔다.

복부 오른쪽 아래의 묵지근한 통증과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기 힘들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이 들었다.

"대단한 "6월 17일.
아침에 일어나니 통증은 어느 정도 줄었다.
하지만 확실히 해보자는 생각에서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 결과를 찾고, 초음파 검사를 했다.
그당시 혈액검사 결과지에는 "중요한" 수치 변화가 나와있었지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미영이와 한참을 기다려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나니, 결과지에는 "오른쪽 난소가 커져 있다"라는 말만 나와 있었다.
맹장염은 아니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대답했다.

결과지를 들고 응급실 외래로 다시 가니, 나를 산부인과로 보냈다.
크아...30 평생 최초 산부인과를 랑카에서 가는 구나...
기다리는 동안 별별 생각이 오고 갔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내가 모르는 병이 있다면 나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한참만에 진료실에 들어가니 안에는 시원시원한 여의사가 앉아있었다.

"어디서 일하니?"
"캘러니야 대학교"
"아, 그 맨날 싸우는 학교....정말 부끄러운 일이야..."
유쾌한 그 여의사 덕에 나의 약간의 긴장은 누그러졌고,
그녀의 '반발통'검사와 피검사 결과 대조로 나의 병명은 "충수염"이 되었다.
(맹장염은 사실 잘못된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알아보기 쉬우라고 맹장염으로 표기한다.

맹장염의 특징은 오른쪽 아랫배를 눌렀다가 '떼는 순간', 더 아프다는 것이다. 그 의사는 내 배를 몇 번 눌렀다가 떼면서
"그것봐 , 아프지? 넌 맹장염이야..."했다)
그녀는 외과 의사에게 연락을 취하고 그의 이름을 적어주었다.
나는 졸지에 수술 대상자가 되었다.
내가 아침에 받은 피 검사 결과에는 이미 염증 수치가 과다하게 나와있었다.
누군가 이것만 대조했어도 좀 더 진단이 빨랐을텐데...나를 뺑뺑이를 돌려??

나는 international SOS에 연락을 했고, 미영이는 현지 사무소에 연락을 했다.
SOS는 스리랑카에서는 맹장수술을 받을 수 없다며, 싱가포르에 갈 거라고 했다.
내가 싱가포르에 가게 되다니...
지금은 신종플루 때문에 랑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어있는데...그래도 난 간다! 하는 조금은 즐거운(?)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내 생각에 마취과 의사 같은 사람이 들어와서 이것저것 질문했다.
집도의도 들어왔다.
'어 이건 아닌데? 난 싱가포르 갈 거라구!'
하지만 사실 맹장염을 나 스스로 조금은 의심했던 순간부터 스리랑카에서 수술받을 결심은 되어 있었다.
SOS 역시 말을 바꾸어, 비행기를 탔다가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냥 현지에서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주위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스리랑카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복을 입고, 머리에 모자를 뒤집어 쓰고 휠체어를 타고 수술실로 향했다.
나에게 기도를 해주었던 3명의 친구들이 내가 너무 담담해서 신기하다고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침대 위에 누운 나를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리게 하고 이것저것 부착한다.
'아 쪽팔려....왜 난 아직도 제 정신인 거야.."
어느 순간 왼쪽 팔에 차가운 액체가 주입되었고, 기억은 끊어졌다.


다시 어느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궁금했다.
"~~웰라워 끼여더? (몇 시예요?)"


처음 하고 싶었던 말이 싱할러인 게 신기했다. 싱할러는 진정 내 마음 속에 있는 거죠!
하지만 아마도 기도 삽관을 했을 목이 완전 잠겨 있었기에 아무도 알아듣지는 못했을 거다.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복부에 통증이 밀려왔다.
'이거 뭐야? 더 아프잖아....병원 괜히 왔네....이런....
아...맞다 나 수술했지"
기억이 끊어졌기에 내가 배를 열어서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이다.

칼을 댄 부분 뿐만 아니라 배 전체가 아프다.
회복실에서 계속 사람들을 불러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들에겐 수술환자가 별 대수가 아닐 것이므로....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외국인 여자가 이러고 누워있다는 사실만은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오후 7~8시경 입원실로 올라왔다.
친구 네 명, 부소장, 행정원이 와 있었다.
랑카 단원 최초로 "배를 째서 여는"일을 감행했기에 다들 몰려왔나 보다.
(사실 맹장염 수술을 받은 건 내가 처음은 아니다. 예전 단원은 복강경 수술을 했다가 후유증에 고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배 전체에 통증이 너무 심해서 한국의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진통제를 요구하라고 해서, 진통제를 팔뚝에 맞았다.
그리하여 6월 17일. 랑카의 운명적인 그날밤은 약에 취해 잠들게 되었다.

그 당일에는 아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닥치는 대로 맞이한 일들이었지만
한참 지나서 생각했을 때, 매우 큰 일이었다.

내 나이 서른이지만, 여전히 애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타국에서, 엄마께 칭얼대지 않고 이 모든 일을 해내서 이제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준 모든 친구들과 힘이 되어준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학교가 휴교를 해서 내가 수술 기간과 회복 기간 동안 아무 걱정없이 쉴 수 있었다는 것에도 감사한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에 또 하나의 특별한 경험을 만들었고,
내 배에는 잊을 수 없는 3cm의 수술 자국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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