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늙음





American Airlines를 타고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
비행기 우측 창측에 앉은 내 좌석 라인 배식(?)을 담당한 분은 동양인 중년 아저씨였다.
나카무라, 다케시 같은 이름이 붙으면 알맞을 것 같은, 좋은 인상에 동글동글한 대머리를 지닌, 임무에 충실한 아저씨.

7개월 전에 역시 AA를 타고 미국에서 돌아올 때, 우리 라인을 맡은 '서양인' 할아버지는 불쾌할 정도로 경직된 태도로 배식 속도전을 전개하는 분이었는데, 우리 라인 전체가 그 속도에 압도되어 찍소리도 못 하고, 재빠르게 밥을 건네 받고 재빠르게 먹고 식판을 건네주었다. 그래서 상대편 라인에 비해 우리쪽 라인은 모두 급하게 식사를 완료했었다.

그때에 비해 이번 아저씨는 느낌이 좋다. 온화하게 생기셨고, 한국 여자 둘(옆자리 분은 모르는 분)이 나란히 앉은 우리에게 선물하듯이 "Ice Cream for ladies~~" 를 내미시는 분이셨다. 모두에게 주는 아이스크림인데도, 그것을 마치 우리만 받는 듯한 기분이 들게 서빙을 잘 하는 분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늘 맥주만 마시다가, 그것도 지겨워 이번에는 와인을 마셔보기로 했다.

"White wine 주세요."
"술은 21살 이상에게만 줄 수 있는데... 원래는 신분증을 봐야 하는데...(진지)"


허걱.
너무 당황해서 뭐라고 영어로 한마디 대답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아저씨가 지나가고 나서야 능숙하게 "I'm over 30~~~" 라고 대답했을걸...하고 입에서 맴돈다.

저번 비행기의 서양인? 할아버지처럼 맡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분위기가 아니고, 이번 동양인 아저씨는 워낙 '이왕 할 거 즐겁게 하자' 분위기의 아저씨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아저씨, 여자 기분 좋게 하는 법을 아시네 ㅋㅋ'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27세, 28세였으면 그냥 진짜 기분 좋게 넘기고 말았을 농담이었다.
그런데, 이제 30대 후반에 이르다 보니, 이것이 그저 농담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절박한' 마음 속 사투가 시작되었다. 하.하.하.


'진짜 날 어리게 본 거 아닌가? 저 아저씨가 원래 즐겁게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자 승객이 와인달라고 할 때마다 "21살 넘었냐?" 이러고 농담 던지고 다니기도 귀찮을 거 아냐? 씨알도 안 먹힐 너무 뻔한 농담이잖아. 정말 내가 어려보였을지도 몰라.'

'그래도 정말 어느 정도는 내가 어려보였던 것 아닐까? 정말 가당치도 않게 늙어보이는 중년 아줌마한테 "21살 넘었냐?" 이러진 않을 것 같은데.'



내 뒤에 앉았던 언니도 이 분의 친절함이 좋아서 명찰을 봤는데, 이름이 "Chen"이었다고 한다. 일본인일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중국계이신 듯. 비행기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를 해주니, 친구가 "오, 동양인 나이 잘 모르는 서양인도 아니고 동양인이 그랬다면 정말 어리게 봤나보네" 하고 그 친구 역시 '접대성' 코멘트를 날려 주었다.

하지만,
이러다 보니
점점 내가 더 불쌍해진다.
"젊어 보인다"라는 말에 좋아라 하는 것은 정말 내가 늙었다는 증거지.

곰곰 생각해보니,
할머니한테도 기분좋으라고 할 수 있을 농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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