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덕 서우봉 해변, 카페 [머물다]





떠나기가 아쉬워 서울행 비행기 시간을 계속 연기해놓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은 없던,
비오는 제주도의 월요일.

공항에 와서 일단 짐을 부쳐놓고(밤 9시 비행기였는데, 오후 3시 전에도 짐을 부칠 수 있었다.) 버스 노선 검색. 그래도 섬에 왔으니, 서울엔 없는 바다를 보며 쉴 수 있는 바닷가 카페에 가기로 마음을 정함.

6kg 배낭을 부치고도 남은 짐이 무거워 (부칠 수 없는 랩탑, DSLR 카메라, 아이패드, 충전기들...) 될 수 있으면 직행버스를 타고 바닷가에 갔으면 했는데 이름난 해변 중엔 공항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없다. 알고 있는 건 모슬포 가는 직행 버스 뿐. 모슬포는 사실 두어 번 가봐서 별로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외버스 터미널 가서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바다에 가고 싶진 않았다. 공항에서 너무 가까운 바다도 별로 안 내키고.
모슬포로 직행하는 755번 버스를 30분째 기다리던 중에
눈에 들어온 38번 버스 노선도. 함덕 서우봉 해변. 가보지 못한 제주 북쪽 바다.


급히 블로그들 검색. 여행지 블로그는 믿으면 안 되지만 ('맛집'이 아닌 '내가 가본 집'이라는 뜻이니..) '카페 머물다'가 좋아 보여서 그냥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다시 38번 버스를 40분간 기다렸다. 제주도에서 운전을 못 하면 버리는 시간이 너무 많다.
효율성은 떨어졌지만 구태여 시간에 쫓길 이유는 없었기에 그냥 계속 기다림.


38번 버스는 제주 시내를 돌아서 50분 만에 함덕 서우봉 해변 정류장 도착.
버스에서 내리면 대명콘도가 보이고, 이 콘도를 오른쪽에 끼고 얕은 언덕을 오른 다음, 다시 갈래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 조금 가면 카페 '머물다'가 나온다.


작고 따스한 분위기의 카페.
손님 한 분만 커피를 드시고 계셨는데,
어디선가 주인 아주머니가 나타나서 음료를 만들어주시고 다시 사라지셨다. (자몽 에이드 4천원)



탁자 외에도 신발 벗고 올라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음.
와이파이 속도도 적당하고,
조용히 울리는 가요들은 비 내리는 날씨에 딱 맞고.
마침내 아저씨 한 분도 사라지고 카페에는 나 홀로 남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귀신같이 나타나서 남겨진 찻잔들을 치우고 다시 사라지심.



하나 하나 공들인 장식품들.
아마도 주인 아주머니의 작품일, 자수 공예들로 카페가 채워져 있다.




비 오는 날, 이런 유리창 사진은 저렴한 감성들이 막 스며나오게 만든다.
이날은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자막들이 생각났다.
'흐린 유리창을 통해 보는 것처럼
과거는, 볼 수는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희미하고 뿌연 것' 뭐 이런 내용.
보이기는 하지만 만져지지는 않는 물방울의 차가움.
ㅎㅎ 저렴하다.



위의 찻잔과 주전가는 100% 천으로 만들어진 작품들.


음료를 산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혼자 있을 빗속 공간을 산 것 같았던 시간.
이런 기회도 흔치 않겠지.
하지만 당일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뚜벅이 여행객인 나는 이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 했다. 내가 타고 온 38번 버스는 운행 간격이 40분인 버스. 놓치게 되면 다음 시간이 모두 애매해지는 그런 불편함. 그것 때문에 서울보다 썩 편리하지는 않은 교통 앱으로 버스 위치를 조회하느라 카페에서의 이 시간을 아깝게 많이 흘려보냈다.

함덕 서우봉해변 정류장은 이 버스의 종점에서 가까운 곳으로, 일단 버스가 종점에서 출발만 하면 금방 이곳에 도착한다. 카페에서 가져온 명함 뒤 약도에 '함덕해수욕장 무료 주차장'이 안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차를 가져와도 좋을 듯.
나처럼 당일치기로 이곳을 둘러볼 분들은 버스 도착 뒤에 길을 건너 반대편 정류장에서 제주시내행 버스 시간표를 확인을 하는 것을 권장.

카페를 나서면 바로 앞에 예쁜 바다가 있다. 풀밭도 있고, 조각품들도 있는 것이 인상적.
비가 그치지 않아 오래 둘러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어쩌면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적하고 더 좋았는지도.
시간이 지나면
만질 수 없는 과거가 되어 가끔 생각날 곳.
카페 머물다.

의자도 서로 등돌리고 있으니 쓸쓸해보인다.
다음엔 다정한 친구와 함께 올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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