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 적부터
내가 '반항'한 것들은
대부분 어떤 '단체' 활동에서 '억지로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반장 선거 후보에 올랐는데,
남앞에서 말하는 게 무지 싫었던 나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나같이 소극적인 애가 반장이 될 리는 없었지만, 억지로 나가서 소견 발표를 하는 것도 너무 싫었다.
결국 엄마에게 질질 끌려 교실 앞까지는 갔고, 담임 선생님이 일단 내 책가방을 교실 안에 들여놓으셨다. 하지만 결국 나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 반성문을 썼다. 웃긴 건, 4교시는 끝날 시간 쯤에 맞추어 책가방을 가지러 가기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장 선거가 끝난 다음 날부터는 정상 등교 했다.
난 어릴 때부터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크리스마스 때마다 외갓집에 모여 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선물을 주는 전통? 가내 풍습?이 있었는데, 나는 친척들 앞에서도 끝내 침묵을 지키다가 들어오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우리 가족'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0점 줄거야'라는 협박(?)에도 결국 입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몇 분 만에 그냥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 선생님이 성적표에 기록해주신 '어린아이다운 활기가 부족함'이라는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대중 앞에서의 두려움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뜬금없이 반장이 되고 (1년 전의 내 모습과 비교하면, 그때 어떻게 내가 반장이 되었는지는 대체 기억이 나지도 않고, 지금도 이상하다.) , 중학교 때 3년 연속으로 반장으로 하게 되면서 신기하게 고쳐졌다. 그 위치는 남들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위치였으니까. 지금은 백여 명 앞에서도 떨지 않고 발표할 수 있고,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써가며 사회를 보기도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반장이 된 것도 신기하다.
아무 선행학습 없이 나름 서초 지역의 유명한(?) 여중에 입학했던 나는, 소위 '반편성 배치고사'라는 것을 그 반에서 제일 잘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체육 교과 담당이셨던 우리 담임선생님은 나를 포함 딱 2명만 찍어서 반장 선거에 나가게 하셨다. 그렇게 그 두 명이 반장, 부반장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목소리 작고 소심 했던 나는 반장이 됐고, 떠드는 학생들을 통제를 못해 지나가던 선생님들에게 혼나고 나면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쏟곤 했다. "아휴, 쟤 또 울어?" 반 친구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다가 그 해 여름방학 때 '간부 수련회'라는 것을 갔는데, 애초에 이런 종류의 '단체 숙박 활동'을 좋아하지 않던 나는 정규 교육 수업 일수에 포함된 날짜도 아니고, 부가적으로 방학 때 참여해야 하는 이 수련회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나는 또 이상하게 반장으로 뽑혔고, 전교 학생회의 간부 역할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이른바 '바른생활부' 차장.
대체 뭐하는 부서였지는 모르지만, 우리 엄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분이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면, 내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파워가 컸던 것 같다. 내 기억에는 내가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1학년 말에 그냥 결정되어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교 학생회의 간부가 되면, 매주에 한 번씩 등교 시간에 주황색 완장을 차고 서서 복장이 불량한 학생을 적발해서 이름을 적어내는 일을 한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 이상한 일이다.
전교 학생회 '바른생활부'의 부장은 3학년 언니였는데, '바른생활부'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뭔가 비행을 저질러 갑자기 학기 중간에 사라졌고(전학? 퇴학?), 나는 2학년인데 부장의 역할까지 넘겨받았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 또 간부수련회를 간다는 것이다. 작년처럼 '각반 반장팀'에 속해서 그냥 묻어가면 되는 일도 아니었고, 나는 전교 간부라서 3개 학년 모든 학급에 흩어져 있는 '바른생활부장' 팀을 통솔해야 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나는 '이놈의 간부수련회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 라는 작년의 다짐을 그대로 실현했다.
그냥 막무가내로 가지 않겠다고 하자, 여러 선생님들이 설득에 나섰고, 교무실에도 몇 번 불려갔지만, 결국 '바른생활부 주임'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자, 결국 그 선생님도 포기하셨다. 나를 뺀 여러 학생들은 그 간부 수련회를 다녀왔다. 그 일로 미운 털이 박혔는지, 보통 전교 학생회 2학년 '차장'들은 3학년이 되면 '부장'을 그대로 승계했지만, 나는 3학년이 되면서 "짤렸다".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은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늘, 단체로 숙박하며 뭔가를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던 나인데,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에 가야했다면 정말 우울하고 힘들었을 것 같다. 군대에 안 가거나 다른 방법으로 입대하기 위해 무슨 수단이든 동원했을 것 같다. 물론 대부분 순응적이고 시킨 일을 그럭저럭 해내는 내 성향으로 봤을 때 군대에서도 어떻게든 적응은 했을지 모르겠다.
KOICA 단체 숙소의 에어컨 있는 방이 내집보다 더 깔끔했던 스리랑카 생활을 거치면서, '단체 숙박 거부증'은 옅어졌다. 이제는 여행 중에 호스텔 10인실에서도 잔다.
하지만 나로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극도의 단체 생활 혐오주의 때문에
한국에선 여자로 태어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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