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롤랑 가로스, 라오니치

라오니치, 왜 지금 그보다 테니스를 잘 하는 선수가 전세계에 8명 밖에 없는지 입증하다.




(내가 처음 목격(!)한 19살 라오니치의 뒷모습ㅋㅋㅋ)

웬일인지 거의 20여 시간째 잠이 안 오는 새벽 4시....
잠들려고 잠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질 시몽:밀로쉬 라오니치의 경기 중계를 켰다.
얘네 아직도 하네.... 파리는 오후 9시. 야외 경기인데 해가 참 길기도 하다. 시몽이 먼저 6-4로 첫 세트를 가져간 뒤 3-6, 6-2, 2-6으로 시소를 탄 뒤에, 마지막 5세트에서 라오니치가 5-4에 서브권을 가져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자기 서브 게임만 지키면 캐나다인 최초로 롤랑 가로스 16강에 진출하는 상황.


그런데 갑자기 시몽이 브레이크를 하면서 경기장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악명 높은" 프랑스 관중들은 라오니치가 서브를 넣기 직전까지도 큰 소리를 내며 자국 선수 시몽을 응원했다.

Merci, Merci, S'il vous plait, merci, s'il vous plait.... 심판의 호소가 이어져도 관중들의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라오니치가 그 분위기에 그다지 흔들려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5-5가 되면서 쉽게 끝날 것 같았던 경기는 다시 이어졌다.

단 두 대회만 ATP 경기 직관을 해 본 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늘 먼저 중계 화면에서만 보다가 나중에 실제로 경기 장면을 보게 된다. 우왓! 저 선수!
그런데 라오니치의 경우는 실제로 본 게 그를 처음 알게 된 계기이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던 이름.

2010 도쿄 오픈에서 나달의 16강 상대. 쟨 대체 누구지?

지금 와서 생일을 검색해보니 그때 라오니치는 아직 만 스무살이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하고 나니....음...


이 처음 보는 10대 청년은 엄청난 서브를 장착하고 있었다.
서브를 꽤나 잘 넣었던 2010 US open 우승 직후였던 나달도 덩달아 좋은 서브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중에 경기 기록을 찾아보니 라오니치 14, 나달 5개의 서브 에이스 기록이 나왔는데, 이건 이 둘이 서로 붙은 어떤 다른 경기보다 서브 에이스가 많이 나온 경기이다.
(update! 2015년 3월. 이 두 선수의 6번째 만남에서 라오니치 19, 나달 7개의 서브 에이스를 기록하면서 마침내 라오니치가 對나달 첫 승리를 기록하게 된다.)
나달다운 멋진 랠리를 남겨놓기 위해 카메라 동영상을 찍을 준비를 했던 나는, 서브 에이스, 끝. 서브 포인트, 끝. 3구 내에 에러, 끝.... 서브 빼고는 뭐하나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이 없는 경기 진행에 지쳐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서브 하나는 엄청난 청년이었지만 그 외 다른 것들을 너무 못 해서 경기 자체가 오래 가지 못 했다. 73분 만에 6-4, 6-4로 나달 승.
아무튼 그 이후로 서브 하나는 기억에 남던 선수여서 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투어 대회 우승도 몇 번 하고 어느새 랭킹도 올려 세계 랭킹 9위에 안착했다.
탑10에 들고도 늘 서브 밖에 없는, 한계가 명확한 선수로 거의 '조롱감'에 가까웠던 이 선수는 2014년 클레이 시즌, 마침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냈다.

로마 오픈 준결승에선 3시간 동안 조코비치를 압박했고, 롤랑 가로스 3라운드에서는 프랑스 관중의 야유를 뒤에 두고도 흔들림없는 실력과 멘탈을 유지,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냈다. 예전에 비해 모든 샷을 참 자신있게 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너무 자신에 넘쳐 막 쳐대다가 중요한 순간에 브레이크를 당하기도 했지만.
시몽을 응원하는 프랑스 관중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5-5 상황, 라오니치가 시몽의 게임을 브레이크백 해내며 시몽의 정신력을 붕괴시켜버렸다.



기어코 5-5까지 따라갔다가 5-6이 되어버려 혼이 빠져나간 시몽. 저 화면 내가 캡처하기 전에 '끄아악~~!'하고 고함을 질렀었다. 반면에 평정을 유지하는 라오니치. 
라오니치가 마지막 자신의 게임을 잘 지켜서 마지막 세트 7-5 승리로 16강 진출. 늘 그랜드 슬램 대회 16강이 최고 성적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라운드도 기대하게 하는 경기력, 그리고 무엇보다 평정심과 끈질김이 인상깊었다.




코치 류비치치님의 업적인가요? 한 선수가 이렇게 발전하는 건 드물게 봤는데...
늘 유망주로 이름만 오르내리다가 어느새 '10년째 유망' '노망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선수들을 많이 봤다. 
우연히 초창기 플레이부터 봤던 선수가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고 놀랍다.
내가 본 두 개의 ATP 대회에 모두 참가를 해서 매우 가까이에서도 봤던 라오니치, 이상하게 정이 가네.
씨익~.
몬테네그로 출신 캐나다인으로, 프랑스어도 어느 정도 구사하는 라오니치.


경기 끝나고 파브리스 산토로가 그를 배려해 영어로 질문을 했으나, 자신이 먼저 프랑스어로 대답을 했지만 프랑스 관중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에는 너무 평범한 프랑스어. 고개를 갸웃갸웃, 으잉으잉? 하는 프랑스 관중 두 명을 보고 그 모국어 자존심에 질림ㅎㅎ.
(우리나라로 치자면 한국어가 필수가 아닌 교포 청년이 그래도 애를 써서 "오널 기영기에 만촉해요. 아프로 게속 테니스 찰 경기하고 시프요"라고 말했는데, 노력에 대한 칭찬 대신에 '쟤 뭐래???'하면서 갸웃거리는 상황 정도?) 그래도 라오니치는 꿋꿋이 프랑스어로 대답을 하다가 결국 '계속 잘 하고 싶다'는 영어로 마무리하고 경기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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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덧붙임 :)
라오니치-조코비치의 8강전을 보고나니,
라오니치는 시몽과의 경기에서 자신이 왜 랭킹 9위인지 증명하긴 했지만
조코비치와의 경기에서는, 왜 조코비치가 랭킹 2위이고, 라오니치가 랭킹 9위인지 증명했다.
atp 홈페이지가 쓴 이 단어 하나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outclass" 

아직은 진정한 탑클래스 선수들과 상대가 안 됨. 시몽과 경기할 때 자연스러워 보였던 모든 기술이 조코비치 앞에선 풋내기처럼 보임.
침착해보였던 정신력마저도 모든 것이 흔들흔들.
그러나 캐나다인으로서 첫 메이저 8강에 든 것만으로도, 앞으로의 목표 수정과 노력의 동기 부여는 충분히 되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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