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허세의 중간





요리 중에 도마를 꺼내기 싫어서 버섯을 손에 쥐고 썰다가 손가락 피부를 같이 썰었다.
동사를 다른 단어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단어가 더 어울린다.
썰다.
물론 손가락 자체가 아니라 표피의 일부만이다.




즉시로 상처에서 피가 꿀럭꿀럭 넘쳐나와 버섯에도 스며들고 바닥에도 뚝뚝 떨어졌다. 여태까지 내가 입어본 상처는 찰과상 정도라서 피가 은근히 스며나온 것 뿐이었는데, 이 정도로 피가 철철 흐르는 건 거의 처음 본 듯 하다.

엄마, 언니가 내가 칠칠치 못하게 행동하는 걸 엄청 싫어하기 때문에 티도 못 내고 조용히 내 방으로 와서 고무머리끈으로 상처 아랫부분을 압박했다. 으이그... 대체 커다란 식칼의 칼날이 자기 손을 향하는 방향으로 쥐고 써는 사람이 어디 있니. 이건 남한테 말도 못해. 그래도 생각보다 피는 금방 멈추었고, 상처도 정돈됐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아서 오히려 나쁜 피가 쭉쭉 빠져나가고 순환이 더 잘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손가락 따 듯이.





며칠간 일명 '대일밴드' 라는 것만으로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다 아문 줄 알고 약간 오래 목욕을 했더니, 방에 돌아와서 밴드를 떼자마자 다시 피가 철철 흘러 뚝뚝 떨어진다.
아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수 기능이 있는 테이프로 교체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이제 피가 스며나오는 일은 없다. 대신 내 왼손 검지의 지문은 바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지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줄이 하나 휙 그어져있다. ㅎㅎ





그랬는데...
오늘 젖은 수건을 쥐고 물을 짜내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힘을 주었는데, 상처 부분이 꽤나 아프다. 입에서 약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상처의 겉부분은 이제 모두 붙은 듯 해보였지만, 속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있었다.




상처는 이렇게 쉽게 아물지 않나보다.
겉은 멀쩡해보였는데, 생각보다 속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구나.
자극만 주면 튀어나와 아픈 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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