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쳰먼동(前门东)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기다리니
저 멀리서 예상치 못했던 2층 버스가 다가온다.
인구 많은 베이징이니 그게 그저 시내버스겠지만, 나에겐 관광 느낌이 2배가 되니 2층에 올라가서 앞쪽에 저리 잡았다. 묘하게 신남. 🫡 색깔까지는 기억 못했는데, 내가 2층에 앉아서 찍은 사진 중에 반대편에서 오는 버스 사진을 보니 런던처럼 베이징도 빨간색이네?
몇 정거장을 지나니 창밖으로 베이징 기차역이 지나간다. 톈진에서 고속철을 타면 베이징남南역으로 도착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베이징역을 볼 일이 없었다. 예전에 고속철이 없던 시절 - 베이징역에서의 20년 전 강렬한 기억도 되살아남.
베이징에서 언어 연수 중이던 대학 동기를 만나러 천진에서 북경으로 "상경"한 나. 역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저 역 앞에서 그때 친구가 찍어준 사진도 있다.
저 광장, 아니면 역 건너편으로 가는 육교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어린 여자 아이 한 두명이 내 다릴 감싸고 주저앉았다. 놔주지 않는 베이징역 특유의 구걸 방식. 🫨 너무 놀람. 다른 곳에서는 이런 걸 겪은 적이 없다.
희화화하려는 게 아니고, 사람 사진으로 설명하는 게 더 이상해서 판다 사진을 가져옴. 이렇게 아이들이 내 다리에 매달렸다.
멀리까지 다리에 매달려 갈 수는 없으니 어느 시점이 되면 포기를 하니까 돈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내 친구가 충고를 했는데, 내 다리를 잡고 놓지 않는 아이 때문에 너무 당황해서 결국 지갑에서 집히는 대로 5元 지폐를 줬다. 한국 돈 당시 환율로 600원 정도? 돈이지만 그때 톈진에서 우리 옆집 살던 가장 월급이 800元이라고 했었으니...한국 사람 월급을 160만원 최저치로 잡더라도 비율상 만 원 가치가 있는, 구걸로 얻을 수 있는 큰 돈이었다.
그러자 그걸 보고 다른 여자아이가 또 내 다리를 잡고 주저 앉았다. 아... 이를 어째.
계속 주면 더 몰려 들테니 이번에는 끝까지 무시하며 버텼던 것 같기도 하고... 1元 주고 끝낸 거 같기도 하고 기억이 잘 안 남. 내가 처음에 당황해서 5元 꺼내는 바람에 다른 아이들이 더 달라붙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 남. 한 아이는 5元을 얻었는데 다른 아이는 소득이 없자 화를 내며 사라져갔던 것 같기도 하다.
베이징 상경하자마자 혼이 다 빠짐.
너무 강렬한 기억이었다.
수도에 상경하자마자 고단한 삶의 현실과 마주함.
1988년의 우리나라도 그랬듯이
베이징도 2008년 올림픽을 기점으로 환골탈태를 했고, 요즘의 모습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옛날 베이징이 아니다.
2025년에 베이징 기차역을 지나가며 옛날 생각을 했다.
시내가 많이 변해 다 바뀌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역 광장 앞에는 육교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휙 지나갔기 때문에 사진은 찍지 못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니...내가 그 여자아이들에게 다리를 잡힌 곳이 역 광장이라고 지난 몇 년간 생각해왔는데, 육교 위였다는 기억이 더 강해졌다.
중국이 이렇게 엄청나게 변할 동안, 내 다리를 잡고 안 놓아주던 그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올림픽 같은 것을 계기로 '외국 관광객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일'을 저 멀리 보내버리는 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만큼 변화의 기회가 많았던 중국, 그 아이들도 어디선가 나보다 더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적어도, 나처럼 우유부단 회피형이 아닌, 삶의 현장에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이었으니까 그 힘으로 뭔가 잘 해내고 있기를. 이러는 게 굉장히 위선적인 것 같지만... 진짜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때든 지금이든, 인구 2천만의 베이징에 자리 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넷플릭스에 있는 영화 '먼훗날 우리' - 后来的我们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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