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요즘 미국 드라마 '뿌리' Roots 2016 리메이크작을 보고 있다.
그들의 문화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아메리카로 끌려온 사람들의 고통이 절절히 느껴진다.


8부작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선 일단 4부작을 방영할 모양이다.
4부작이라고 해도 1부의 길이가 2시간 가까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길다.


몇 대에 걸친 이야기를 다루는데,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쿤타 킨테'의 등장 분량은 상당히 적다. 그런데 아주 아주 어린 시절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던 '뿌리'하면 왜 쿤타 킨테만 기억이 나는 걸까. 게다가 어릴 적, 그 이름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놀릴 때 사용되었던 것 같다. 피부가 상대적으로 검은 사람...등등.
인종과 외모에 대한 차별은 사실 어느 문화권이든, 어릴 적부터 뼈 속 깊이 배우면서 자라는 것 같다.
그리고 자주 대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낯설음은 누군가에게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고.


나는 작년에 아메리칸 항공을 타고 달라스에 두 번 다녀왔었다.
처음에 갔을 때, 공항에 도착할 때쯤 기장이 '여러분 왼쪽을 보시면 아름다운 달라스-포트워스 공항이 보입니다.' 하고 방송했었다. 멀리서 보면 원을 이루는 반원 모양 터미널이 5개, 즉 나란히 3개의 타원형이 줄지어 선 모양을 하고 있는 초거대 DFW 공항을 위에서 내려다 볼 기회는 흔치 않겠지.


영화 Up in the air 앞부분에 나오는 DFW 공항 모습



그래서 두번째 여행 때는 착륙할 때쯤 내가 그때까지 앉아서 가던 창가 자리를 바꾸어 엄마를 그 자리에 앉게 해드렸다. 엄마는 등을 확 돌려서 완전 창가에 빨려들어갈 것 같은 자세로 바깥 풍경을 보고 계셨다.


나중에 내가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창에 딱 붙어서 갔어?"
"옆에 앉은 흑인이 무서워서"
".......@.@."




아, 엄마와 나는 이렇게 세대 차이가 나는구나.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가 엄마와 자리를 바꾸기 전까지 12시간을 같이 옆자리에 앉아서 갔던 그 분은 한국에 군대 관련 회의 때문에 방문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고, 비행 시간 내내 책을 읽으셨던 아주 온화한 분이셨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그저 그분이 'African american' 이라는 것 때문에 공포를 느끼셨던 것이다. 요즘도 나이 드신 분들 중에 '아프리카에서 뛰어놀던 깜둥이'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을 자주 본다. 이런 묘한 공포는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거겠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후대에 보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 될 수 있는지 새삼 느낀다.


노예제도,
동성애자에게 화학적 약물을 주입하라는 판결을 내리던 일 (imitation game에서 봄),
남아 선호 - 남존여비 사상.....




내가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중에도
시간이 흐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될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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