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나에게 없는 습관
'노화'를 알게 된 곳
늙었구나... 새삼 느끼게 한 곳 , 헬싱키.
당시에는 너무 피곤해 누워만 있고 싶고, 생소한 지역에 처음 도착해서 당황했던 것도 그랬고... 그게 노화의 징후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도시가 신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피곤한 ...그런... 익숙한 것에만 반응하는 그런 삶.
이제 한 달이 지나 돌이켜보니, 나의 태도 자체가 내가 생각하던 '늙은 분들'을 닮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게 됐다. 그래서 헬싱키는 깨우침을 준 도시가 됐다.
헬싱키가 좋았던 점의 하나는 나 혼자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내 주위에는 북유럽에 다녀온 친구가 거의 없어서 조언해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모든 결정을 내가 내렸다. 그게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내가 남의 말을 안 듣고 내 생각만으로 일정을 만드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정작 말그대로의 '노파심'에서 남의 삶에 자꾸 말을 얹고 싶어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나처럼)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그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경험이 더 많아 잘 안다고 자신하기에' 나의 이야기를 안 듣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도 '늙었기' 때문이었다. "내 경험이 더 많아. 넌 가만히 있어" 바로 내가 어릴 때 생각하던 그 '어른'의 모습이 이제 '우리'가 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조언을 들을 때, 나도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데 왜 그렇게 다들 조언을 해주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도 남에게 쓸데없이 조언을 하고 있었다. 나도 경험있다면서...
남의 이야기 중에 솔깃한 것은 접수했지만 ' 내 경험치가 더 낫다'고 생각해서 흘려보내는 게 많았는데 ....나도 남들에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들도 내 말을 귀담아 안 듣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나도 살만큼 살았어. 응응 알았어. 다 안다구. 알아서 할게.' 동년배의 속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본인도 남한테 주제 넘게 참견할 땐 하면서도, '내 경험이 더 많아'이러면서 남의 말은 절대 안 듣다가 오히려 더 고생하는 것. 나만 그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도 다 그러고 있었다. 남에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도 '자존심에' 내 방법으로만 하고 싶은 것, 나는 그걸 노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우리도 늙었다.
더 무서운 건, 이제 계속 남의 말 듣기 싫은 나의 꼬장꼬장함과 타인의 꼬장꼬장함을 느끼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부수적 정보
흔적
확실치는 않아서 의문을 품고 여행에서 돌아온지 2년째.
기록의 힘
외국에 총 2년 8개월 정도 살아봤는데, 향수병에 걸린 적은 아직 없다.
간만의 눈물
그 대상은 우습게도 십 여년 전에 기르던 개였다.
한 달 전에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차창 밖으로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그런데 그 개와 전혀 닮지도 않은 우리집 개 "재롱이"가
갑자기 생각나면서 한 번 다시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미 죽은 게 확실한 그 개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사를 가면서 그냥 살던 집에 놔두고 갔는데
수 개월 만에 그 집을 다시 방문했을 때,
멀리서도 우리 가족의 냄새를 알아채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반가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게 반가워하던 모습은 상당히 강렬한 기억이었나 보다.
그런데 오늘은 드디어 사람 때문에 울게 되었다.
내일 군대가는 동생에게 전화를 하다가 그냥 눈물이 나서
대충 잘 다녀오라는 말만 하고 끊어버리고 말았다.
난 내가 군대에 가야만 하는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남자였다면 나라도 면제 받기 위해 뭔짓이라도 했을 것 같다.
불쌍해....
댓글2
- ㅊㅇ경미야..나두 우리집 강아지 생각난다. 다롱이...ㅠ.ㅜ2004.02.26 03:23
- ㅊㅅㅇ미야야 미안, 이 와중에도... "용밥"이 눈에 띄어서 순간 웃음이 살짝 새어 나왔어. 미안미안^^2004.02.27 12:23
햇살이 쏟아질 때는 그 햇살을 모름
통과 의례?
줄어든 나의 치약
사라진 나의 클리넥스
사라진 나의 펜
사라진 나의 새 이어폰...
3주 동안 민박을 한 결과, 행방이 묘연한 것들이 많다.
짐이 워낙 많아서 어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기에
확실히 문제 제기는 못했지만 정말 사라진게 확실하다면
이건 분명 절도 행위다.
내가 민박을 한 집은 스리랑카 민박계의 허브(?) 같은 곳으로 이번에 온 6명 민박을 모두 주선한 집이다.
18살 ,15살 이쁜 딸들이 있어서 모든 단원 사이에서 유명한 집이지만 나는 이제 '도둑들'이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
현지인과 쉽게 친해지고 현지의 삶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민박이 오히려 불신만 심어놓은 것 같다.
매일 아침 자물쇠를 채우고 외출해야 할 때 사실 난 슬프다.
마지막 날도 짐을 모두 싸 놓고 혹시나 해서 자물쇠가 없는 큰 이민 가방에는 흰 색 리본을 묶어놓았다.
오후에 내 짐이 사무소로 왔을 때 흰색 리본이 풀려있었지만 30KG에 육박하는 내 짐이 너무 무겁기에 2층 방에서 끌고 내려오다가 풀렸겠거니 했다. 하지만 내가 한 쪽 손잡이에만 걸어 놓은 네임택이 양쪽 손잡이 모두에 걸려 있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젠장!
그래도 믿어주려고 했는데 왜 주인 없다고 짐을 뒤질까?
예전에 이 집에서 민박한 애도 옷 한 벌이 없어졌다고 했다.
현지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키운 이 집이 밉다.
그래도 여기에 적응하기 위한 통과의례라 생각하고 넘어가야 되는건지...
Stuck in a moment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남긴 중국 생활,
지나고 보니 상당히 감사한 것 중의 하나는....
중국의 저렴한 물가와 턱없이 부족한 준법정신(!) 덕에
시내 대형 서점에서 쉽게 집어들 수 있었던 불법 복제 CD들이다.
2-3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살 수 있던 ء2cd 모음집 ㅎㅎ.
덕분에 Queen, U2의 베스트 모음집을 아무런 경제적 부담없이 😅
접할 수 있었고, 그들의 노래를 지금 들으면 언제나 중국에 살던 시절이 생각난다.
최근 u2의 내한 공연 후기를 몇 개 보다가
그들의 노래 중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를
제일 좋아했었던 생각이 난다.
중국에서 쉽게 그 cd를 집어들지 못했다면, 아마 몰랐을지도 모를 노래.
새삼 '물가'와 삶의 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 ㅎㅎㅎ
특히 나처럼 돈 버는 재주 없고, 돈 안 벌고 생명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는....
한가지 아쉬운 건,
2004년쯤에도 이 곡의 마지막 가사,
" it's just a moment, this time will pass."에
엄청 위안을 받곤 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간은 여전히 지나가지 않았고
난 여전히 'stuck in a moment' 느낌이라는 거다.
돌아가는 길
우리 고양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런.....
약 1년 전쯤 쓴 글 중 일부.
"하지만 나는 싸이월드, 구글 블로그, 페이스북에 각각 다른 내용을 쓴다.
뭐 일상이 거창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어느새 각각 다른 내용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3년 전에 그렇게 낯설었던 구글 블로그가 이제 가장 편해져서
가장 마음 속 이야기는 여기에 쓰게 된다는 것을.
어쩌면 절친들이 찾아오지 않아서 더 편한지도 모르겠다. 친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 더 솔직할 때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싸이월드는 그냥....미련이 남아서 예의처럼, 습관처럼, 끼적이는 내용들.
그리고 페이스북에는 어쩌면 사회 생활하는 내 모습이 남아있다. 페이스북 친구는 대부분이 스리랑카 학생들이라, 나는 거기서 '착했던 그 선생님'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싸이월드는 딴 생각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내가 혼자 좋아하고 살다가 한 방에 걷어차이고 이혼한 전남편 같고,
구글 블로그는 혼자 남은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다가 결국 내 옆을 지키게 된 새 남자친구,
페이스북은...... 뭔가 목적이 있어서 사귀는 친구 느낌이다.
아픔을 남기고(?) 헤어졌지만 북적북적 부대끼던 옛 시절을 못 잊어, 여전히 서로 예의차리고 안부 묻는 ex남편 싸이월드.
슬슬 정은 붙어 가지만, 친구가 너무 없어 인간 관계의 폭이 좁은 새 남자친구 구글 블로그.
남에게 소개하고 싶기도, 숨겨놓고 싶기도 한 남자친구.
그리고, 함께 있으면 뭔가 자연스런 내 모습이 나오면서도 동시에 가식적인 내 모습 연출도 해야 하는 것 같아서 갸우뚱하게 되는 international한 친구 페북이."
Ex남편 사망 😱
bump into
내가 고양이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내는 "찍찍 psst psst" 소리가 있다. 내가 이 소리를 내면 길 가던 고양이 중 진짜 90% 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한 번 돌아본다. 해외에서도 통함😾. 냥이들은 곧 내가 별 거 아님😂을 확인하고 가던 길을 간다.
그 고민을 너만 하는 건 아냐
야경 감상 중... 더워서 대충 머리 묶으면 이렇게 뒷머리가 듬성듬성 🙄 |
옛날 사람
예전 임도헌 선수가 어느새 국가대표 감독이시네.
아주 가끔 우리 체육수업 시간에 얼굴을 비췄었고,
당시에도 아주 유명한 선수라며 교무주임(??)이셨나 그런 선생님이 멀찍이서 자랑스럽게 이 교생을 지켜보시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선수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지 ㅋㅋ
내가 중학생때는 기껏해야 필름 카메라였던가 ㅎㅎㅎ 그나마도 아무도 학교에 가져와서 찍는다는 생각은 안 했던 거 같다.
아마 요즘 중학교에 유명 운동선수가 교생으로 가면 다들 사진 찍고, 소셜 미디어에 사진 올라가고 난리가 나겠지만, 나의 중학 시절 교생 선생님들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네. (그나마 고등학교 때 교생 선생님들은 사진을 찍었던 거 같다)
증거가 없으니, 대학원때 남자 동기에게 "우리 학교에 임도헌이 교생으로 왔었다!" 했더니 믿지 않더라는 .....
다시 올 수 있어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내 뒤에 앉은 "랑카 초딩"들이 나를 꾹꾹 찔러 다른 한국인 선생님들의 이름을 자꾸 물어보았다.
'친절한 ㅁㅇ씨' 혹은 "친절해 보여야 하는 봉사단원 ㅁㅇ씨"는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고, 마침내 초딩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내 이름이 스리랑카 말로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것을 알게 된 초딩 남학생들은 내 이름 한 번씩 불러보고 놀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름 가지고 남 놀리는 것은 어딜 가나 초등학생들의 특징인가 보다.
"아삐 셀람 꺼러무" (같이 놀아요)
"씽두 끼여무" (노래해요)
친절한 ㅁㅇ씨는 결국 땡볕이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날렵한(?) 스커트와 바닥이 딱딱한 샌들을 신고, 나홀로 초딩들 사이에 둘러싸여 '땅따먹기'를 하게 되었다.
"오야 랏써나이"
(당신은 예뻐요...여기는 피부만 희면 무조건 미인이다;;;)
햇볕이 너무 강하고 땀이 주루룩 흐르도록 더워서 정말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올 수 있어요?"
"언제 와요?"
이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난 여기 와서 무얼 하는 걸까?
왜 나의 여러 행동이 가식적으로 느껴질까?
inscrutable
2013.07.15 03:04
2012년 9월에 이론에서 벗어난 "실기"를 경험하기 위해 태국에서 열리는 테니스 대회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운좋게 그 테니스 대회 전체를 관장하는 supervisor's office에 배치 받아서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오피스에서 9일간 신나게 테니스 경기만 관람하다 왔다.
한국이었다면 커피 한 잔, 복사 한 장, 자기 손으로 안 할 정도의 급은 되는 아저씨들이었지만 테니스계 supervisor들과 심판들은 대부분 유럽 사람이다 보니 남이 그 일을 해주는 것을 불편해했다. 너무 심심해서, 아니면 너무 일을 안 하는 거 같아서 커피 만들기 싫어하는 나조차 "커피를 줄까?" 하거나 복사를 도와주려할 지경이었는데.. 그러면 다들 손사레를 치곤했다. 니 일이나 하라며...내가 알아서 한다고 ..그런데 솔직히 경기 끝나면 스코어 적으러 아래층 내려가는 것 외엔 '내 일'이 없었다. ㅎㅎ 그래서 맨날 경기나 보다가 왔지 뭐.
이 사무실에는 수퍼바이저 mr.S와 영국인 레프리, 이탈리아인, 아일랜드인, 이집트인, 미국인, 프랑스인 체어 엄파이어가 있었다. 다들 유머 감각이 넘치고 뜬금없이 노래 부르고, 농담하고...티비 중계에서 보던 근엄한 심판의 모습과 너무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선 경기만 주로 심판을 보던 태국인들도 있었는데, 다들 한국 테니스 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아시안들끼리만 통하는 감성과 'asianglish'가 있어서인지 즐겁게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체어 엄파이어와 대회 수퍼바이저를 겸할 수 있고 그랜드 슬램 대회 결승전까지도 심판을 볼 수 있는 gold badge를 가진 심판은 전세계에 25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 태국 대회에만 그 골드 배지 심판 5명이 왔다.
이들은 전세계에 (테니스 대회는 1년에 11개월 동안 대양주, 유럽,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등을 차례로 돌면서 매주 세계각지에서 열린다) 본인이 계약된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도시의 공항에 도착하면 주최측이 픽업을 나와서 특급호텔로 데려간다. 그리고 11시쯤 테니스 코트에 와서 하루에 두 게임 정도의 심판을 보고 나머지 저녁 시간을 즐긴다. 올해 은퇴한 베테랑 골드 배지 심판이 1년에 25주 정도만 심판을 본다고 3년 전에 인터뷰한 것을 봤는데, 그 정도만 일해도 가계(?)가 유지될 정도로 보수 수준도 괜찮은가 보다.
매주 거처가 바뀌는 직업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나는 일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거의 최상급의 직업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돈 주고 비행기를 타지도 않을 것 같지만, 매주 세계 여러 도시를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항공사 마일리지 프로그램 등급도 무지 높다. 다들 가방에 거의 항공사의 최상급 티어 태그를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ㅎㅎ
암튼, 서론이 길었는데...
수퍼바이저, 심판들...다들 매주 여러 문화권의 새로운 사람을 마주쳐서인지, 다들 너무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그런데, 난 학교에서 배운 영어 외에는 어떤 실용적인 영어 교육도 받아보지 않았고, 타인과 능수능란하게 영어로 오래 대화하는 환경에 놓여본 적 없었기 때문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 짓고 있다는 동양인의 본분에 충실할 따름이었다. (--;) 외국인들과 일하기 위해서는 농담따먹기 스킬이 필수 조건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자봉들만 심심한 게 아니라, 경기 사이사이에는 심판들도 심심하기 때문에 자봉들이 그들과 놀아주는 것도 일이었다.
반경 500m(?)내에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조그만 동양인이 안쓰러웠는지, 아일랜드 심판 아저씨는 지나갈 때마다 꼭 한마디라도 걸어주었다. 그 아저씨와는 그나마 대화가 잘 됐다. 그리고 처음에는 친해지기 어려웠지만, 유럽의 주요 언어는 모두 구사하는 것 같은 수퍼바이저 mr.S 와도 막판에는 약간이나마 친해져서 이름을 부를 정도는 됐다. 테니스대회는 보통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꼬박 벌어지는데, 그전 일주일전부터 이미 방콕에 도착해있었던 나는 여행의 피로가 누적되어서 목요일에 하루 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사무실에서 만난 레프리 할아버지는 '서양 사람들'의 인사 특성인 ...믿지 못할 "We missed you"라는 말을 하면서 반갑게 맞아줄 정도로 마지막에 갈수록 다들 정이 들었다.
그런데 그중에도 유난히 힘든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N이었다. 뭔가 불만이 있는지 늘 퉁명스러웠고, 서로 굿모닝~ 인사조차 하기 어색했다. 도저히 말을 걸 '건덕지'가 생각나지 않았다. 점심 먹고 오길래, 용기를 내어 "Had a great lunch?" 했더니, "Not great, it's OK lunch." 라고 대답했다. '으이그...그냥 인삿말인데 그냥 좋았다고 하면 되는 거지, 꼭 토를 달아야 하나?'
대회 시작 전부터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친해진 태국인 스태프가 나에게 심판들 하나씩 전해주라며 심판 비상연락망을 주고 갔다. 수퍼바이저 외에는 그 연락망이 솔직히 별 필요가 없다는 걸 나조차도 알겠던데, 그래도 다들 고맙다며 그 종이쪼가리를 기쁘게 받았다. 그런데 N은 그 종이를 받고나서 툭 던져버리는게 내 뒤에서 느껴졌다. '아이고...이 아저씨 이제 포기. 친해지려는 노력 이제 그만해야지' 기본적으로는 농담하기 너무 좋아하고 웃긴 사람이었는데 (심지어는 뒷담화나 가십도 좋아하는) 나와는 나머지 며칠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냈다.
마지막 일요일 결승날, 비행기표 시간 상 어쩔 수 없어서 결승전을 끝까지 보지 못 하고 테니스장을 떠나야했다. "E, C, 나 지금 가...고마웠어..." 다들 즐겁게 인사하고 헤어지는 순간이 왔다. 정말 상사로 모시고 계속 같이 일하고 싶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일주일 내내 데면데면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인데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어서 컴퓨터를 보고 앉아있던 N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어서 mr.N...이라고 조용히 불렀던 것으로 기억난다. 다른 이들은 악수만 하고 끝났는데, 그는 의외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hug를 했다. "토너먼트 기간 동안 애썼어" 뭐 그런 말과 함께. 의외였다. 그냥 인사치레라고 해도.
친하게 지냈던 태국인 자봉 jan언니와도 작별인사를 나누고 테니스 경기장을 서서히 벗어나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잘 끝났다는 안도감이나, 서울이라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다는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70%정도는 요상하게도 N 때문에 눈물이 났다. 내가 마음을 더 열면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and..노력을 안 하니 당최 늘지 않는 회화 실력에 대한 자책...이런 것 때문이었다.
사실 대회 기간 내내 영어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갑자기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환경에 떨어지니 원하는 말이 입에서 안 나왔고...점점 적응할 줄 알았더니...설상가상 한국을 떠나고 열흘 쯤 뒤부터는 시제가 망가졌다. 머리 속에선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입에서는 모든 동사가 과거형으로 나오는 신기한 현상이.... 마지막날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면서 직원이 "너 이제 어디로 갈 거니?"라고 물었을 때 "I went to the airport"라고 답이 튀어나오는 식. 😱 제일 멋져보였던 c 아저씨가 너 퍼스트 네임이 뭐니? 라고 물어봤을 때 Hwang! 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는 짓도 ㅋㅋㅋ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와 내 소심함에 대한 스트레스, 게다가 매일 가야 하는 사무실에 왠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굉장한 스트레스였던 거 같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사람이 그동안 나를 아주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닐 것 같은 느낌의 작별인사를 하자, 아마 뭔가가 탁 터졌던 거 같다.
결승전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을텐데, 내가 혼자 눈이 시큰해져서는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건 아무도 관심없었겠지 ㅎㅎ 외국인은 내 문법 따위 신경도 안 쓸텐데, 틀린 영어를 할까봐 소심하게 웃고만 있었던 나를 자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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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루, 테니스 관련해서 자괴감에 엄청 우울했던 날....
몰랐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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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달이 늙어간다.
하필이면...
lean against...
가끔 호텔같은 데 가면, 넓은 화장실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변기가 있는 경우도 본다.
(사실 이 사진은 그렇게 넓은 화장실의 예시 사진은 아니다. 호텔에서 변기 사진을 구태여 찍지는 않기 때문에 실제로 구조가 맘에 들었던 화장실 사진은... 저장된 게 없다)
어제 새벽에 고통스런 복통에 시달리며 한참 만에 화장실에서 탈출하고 나니, 우리집 화장실이 좁아서 변기 옆에 벽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벽에 갑자기 복통으로 비몽사몽 변기에 앉아 사투를 벌이다가 힘이 빠져, 옆 벽에 머리를 기대어 겨우겨우 기력을 유지했다.
만약에 규모가 큰 화장실에 있었을 경우, 졸린 데다가 힘이 너무 없는데 기댈 데가 없었다면 옆으로 쓰러졌을 지도....
위 사진 속 호텔은 그리 화장실이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옆으로 머리를 기대기에는 옆 유리벽과 간격이 있어 보인다.
가끔 좋은 호텔 룸 화장실에서 '이런 욕조 크고 샤워 부스 따로 있고 넓고 쾌적한 화장실이 우리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 적 있지만 어제같은 사태에서는 우리집 화장실이 좁았던 게 다행.
암튼, 화장실에서 그렇게 기력이 빠져보기도 처음이라 기억에 남는다.
외국 살던 시기에, 안 남겨놔서 후회하는 것들
당신도 이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홍콩 / 심천 국경에서 중국 비자 받기
서울에서 중국 관광 비자 받는 과정이 무척 귀찮아졌다. 온라인에서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참 동안 비자 신청서를 완성하고 비자 접수 날짜를 예약하려 하니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보름에 가까운 여유 시간이 필요해서 나의 출국 날짜에 하루 정도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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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여름 유럽 여행의 수확은 이런저런 게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 근래 몇 년간 동남아 여행 다닐 때 생각보다 영어를 원하는 대로 말하지 못해서, 내가 영어를 굉장히 못 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오히려 영국에서는 내 영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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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 모자 쓰고 일하는 인도 과자 공장'이라는 영상이 떠도는 걸 봤다. 영상에선 일하는 사람들이 위생모만 썼다 뿐이지, 커다란 과자를 바닥에 쏟아붓자 지저분한 공장 바닥에 주저 앉은 사람들이 그걸 손으로 집어서 봉지에 넣고 봉해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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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방에 누워있다가 야경을 보기 위해 밤 8시 넘어 길을 나섰다. 전에 톈진에 살 땐 회식 외에는 밤 외출, 그것도 '혼자' 밤 외출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년 뒤에도 여전히 밤 외출은 낯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