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 아닌 증명



월드컵이 끝나고 "젊은 선수들이 좋은 경험했을 것" 이라고 말한 홍명보 감독의 발언에 대해 이영표 해설위원이 "월드컵은 경험이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나고 보니 이것은 여러 군데에 적용이 되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부모가 되는 것이야말로 '부모가 되어 산다는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은 사람임을 증명'해야 되는 자리가 아닐까.
우리 엄마는 늘 '여자로 태어나서 남들하는 거 다 하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니?' 라고 나에게 결혼과 육아에 대한 욕구를 부추기시기도 하고, 결혼과 멀찍이 떨어져 살던 한 친구는 갑자기 '그래도 내가 지구에 살았다는 흔적은 남기고 죽어야 할 것 같아'라며 자식을 낳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은 이런 식의 '남들 다 하는 경험' 차원을 넘어서서, 내가 30년 정도를 바른 생각을 가지고 남을 배려하며 제대로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전부터 드라마 볼 때 '아기 갖고 싶어" "아이 낳고 싶어" 하는 표현에 약간 의문이 들었다. 미드를 봐도 'baby'를 원한다며 애를 쓰는 사람을 보며 늘 생각했다. Baby 다음은 어쩔 건데?

밤새 빽빽 울고 모든 것을 다 대신 처리해줘야 하는 아기 시절도 나름 부모에게는 고충이지만, 자신의 생각이 생기고 자유 의지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는 자식을 키우는 것은 더 고행일 것이다.

여기서 부모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잘 살아왔는지 증명을 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부모가 되는 경험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부모들이 결국 수많은 사회문제를 쏟아내는 시초라고 본다.
( 아래 예시는 그냥 티비 프로그램을 볼 때, 육아의 어려움에 대해 내가 했던 생각들일 뿐 이런 부모들이 나쁜 부모라서 든 예시는 아니다.)

* 티비에서 병원에 끌려가(?) 아빠에게 힘으로 제압당한 채, 서럽게 울며 치료를 받은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은 그 의료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른다. 그걸 자분자분 설명해준다고 해서 순응하고 병원 진료를 받을 나이의 아이들이 아닌 것은 안다. 하지만 어른은 영원히 알 수 없는, 어른이 된 뒤 까먹어버리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이다.
나도 어릴 적에 이유를 알 수 없이 진료실에 끌려들어가 엉엉 울던 내 모습에 대한 잔상이 아직 남아았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다 그것을 잊고 '너에게 좋은 거야'라며 힘으로 제압해 진료를 받게 해 줄 수 밖에 없다. 그 방법이 아니면 아이 건강이 나빠질테니.


* 아이는 엄마가 자신이 좋아하는 분홍색 색연필을 안 써줬으면 했는데, 기어코 엄마는 그 분홍색을 썼다. 아이는 줄어든 분홍색을 보니 서럽고 엄마의 권위에 비해 무기력하게 자신이 느껴져서 색연필을 집어던졌더니 엄마가 버릇없다며 아이를 혼낸다.

그전에 엄마는 왜 내가 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을 기어코 하셨나요?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엄마가 아이에게 사과하는게 아니라, 왜 아이가 혼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번 돈으로 사준 내 아이의 물건이니까 나는 그냥 쓸 수 있다.' 이 생각 상당히 무서운 생각이다. 엄마는 자신의 아이 시절을 잊었다. 자신의 작은 물건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고 그게 사라지면 모든 게 사라지는 것 같았던 마음을.
좀 더 커야, 이 색연필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고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른의 삶은 퍽퍽하다.
누구도 내 아이의 심성을 곱게 헤아려 가며,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가며, 아이의 동의와 이해를 구한 뒤에 어떤 일을 할 만큼 시간 여유와 금전 여유가 흘러 넘치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내가 이 퍽퍽한 세상에서도 내 아이의 성장 단계에서 할 만한 생각들에 내 생각을 맞추고, 내 자식을 사회적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얼마나 돈을 잘 버는지) 제대로 된 한 인간으로 키워낼 수 있는 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비로소 자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에 대한 억눌린 불안감,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받았던 푸대접...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요즘 들춰보기도 무서운 괴상한 뉴스들의 원인을 제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아기 갖고 싶어, 애도 낳고 좀 의미있게 살아봐라~~ 가 아닌, '인간 낳아 키우기', '사람 갖고 싶어' 측면에서도 생각을 해 봐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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