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사회에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은 새로운 惡(적어도 내 기준에서는)의 발견을 의미했다.
물론 동시에 새로운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모 방송국에서 일할 때는, 계급사회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해외봉사단을 할 때는 부모님이나 주변의 통제가 줄어드는 곳에서 사람들은 저렇게 풀어지는구나...를 느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는 대학원이 내가 알던, 그런 학위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출석이나 공부같은 건 안 해도 된다. 그 학교나 교수의 필요에 따라, 함량 미달의 학생에게도 학위를 그냥 주기도 하더라....
그런데 이런 기관에서 내가 얻은 것들 중에는 이런 '악'에 대한 배움 외에도 또다른 재미와 행복이 많았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언젠가는 내가 그런 '악'에 동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해외봉사단 일을 할 때, 내가 일하던 학교는 서울 근교에 대입해본다면 의정부 쯤에 위치한 곳이었다. 서울 시내 중심에서 약간 거리가 있었고 그닥 화려하진 않았다. 그래도 단원들은 거기에 모여 살며 '서울'에 해당하는 콜롬보로 외출했다.
그런데 한 단원이 '의정부'의 외로운 생활에 영 적응을 못 했는지 서울로 치자면 '수서'쯤에 위치한 좀 더 나은 동네의 친구집에 늘 가서 살았다. 대한민국 정부 돈- 월 200달러-로 집세를 지출하는 자기 집은 비워놓고 친구 집으로 늘 출퇴근을 했다. 말이 서울 근교지, 늘 수서와 의정부를 오고 간다고 생각해보라...그 단원은 점점 우리 학교(봉사활동 기관)에서 멀어져갔다.
그때 내가 느낀 게 '봉사' '무상지원'의 부작용이었다. 그 사람이 피땀흘려 번 월급으로 집세를 지불했다면 그 집을 그렇게 1년 넘게 비워놓을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200달러는 그 단원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늘 지급되는 돈이었으므로 그 단원은 그 가치를 알지 못 했다.
그래서 우리 단원끼리는 말없이, 티 안나게 사이가 안 좋았다. 만나면 반갑고 애틋했고, 고마웠지만... 돌아서면 "쟤 저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 저거 하나만 고치면 평판이 훨씬 나아질텐데... 그거 하나를 못 고치고 고집을 부리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단원은 학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발언권도 점점 더 줄어들었고, 무슨 일이 생겨도 더 혼나게 되었다. 본인의 집을 비워놓음으로 해서 다른 일에 대한 평가도 낮아졌던 것이다. 사무소에서도 '그 단원 수도에서 너무 많이 목격된다' , '그 단원은 일주일 수업 시수가 대체 얼마인 거냐'며 자꾸 나에게 경고를 해서 괴로웠다. (왜 본인에게 직접 경고를 안 하고 나를 떠봤는지 모르겠다. )
어느 날 문득, 나도 하나 고치면 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단 엄마의 불신을 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아주 어릴 적부터 숙제를 밤늦게 하는 편이었고, 밤에 정신적 집중이 훨씬 잘 되었다. 그래서 밤 늦게 자는 버릇이 들었는데...요즘까지도 일찍 일어나기가 아주 어렵다.
엄마는 요즘 기분이 나빠지시면 그것부터 트집을 잡는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낮 12시에 일어나는 딸을 그냥 방치하니?"
나는 묵묵. 할 말이 없다.
나는 묵묵. 할 말이 없다.
나조차도 하나만 고치면 좀 더 나의 평판(?)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안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게으르게 살면서, 모든 나의 선의나 좋은 행동도 나쁘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든 게 그냥 '이기심의 발로'로 평가되어 버리는 거다.
인간은 결국 다 똑같다.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남 욕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늘 새로운 惡을 배우지만,
내 안의 惡도 발견한다.
결국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남 욕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늘 새로운 惡을 배우지만,
내 안의 惡도 발견한다.
- 등록일시2013.02.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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