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보니
나와 같은 업무로 한 호텔에 숙박했던 백 여명 모두가 덩치 큰 장정(?)들이고 여자는 단 두 명뿐(나머지 여자 한 명은 내가 모르는 외국인)이어서 무척 긴장했었던 1월.
마지막 일을 마칠 때쯤엔 그 사람들에게 적응했었기 때문에 그 긴장을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친구에게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기억을 되살려보니, 초기의 나는 상당히 겁을 내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ㅎㅎ
하지만 한국인 여자가 혼자였던 덕분에
남자들 대부분이 2인 1실이었지만 나는 나 혼자 방을 쓸 수 있었고
한 달 이상 지난 지금, 그때의 평화로움이 너무 그립다.
일, 동료들에게 적응하기 전 일주일은 기절할 것 같이 힘들었지만
적응을 마치고 난 일주일은 평온한 편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무엇보다 샤워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게 그립다.
침대 옆에 바로 딸린 (유감스럽게도 집보다 깨끗한) 욕실에서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지금 내가 사는 집은 샤워할 수 있는 욕실이 두 개 있기는 하지만 둘 다 내 방에서 제일 멀다.
(물론 우리집이 넓은 집은 아니라서 10초 안에 금방 도달하지만ㅋㅋ)
집에서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샤워하는 것도 조금 제약이 있고, 화장실 공간도 샤워만을 위해 설계된 공간이 아니라서 난잡스럽다. 쓰지도 않고 버리지도 못하는 물욕이 많은 언니의 잡다구리한 물건들이 사방에 놓여있는 정신 사나운 욕실. 샤워 부스나 커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사방으로 물이 튀어 신경도 쓰인다.
'화장실 딸린 방'에 살던 편리함이 그립다.
'화장실 딸린 방'에 살던 편리함이 그립다.
그리고 난 평소 TV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또 그리운 것은 나의 자유로운 채널 선택권.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독립한 뒤 어쩌다 집의 막내가 된 나는, 집에선 채널 선택권이 없다.
TV를 열심히 보는 편이 아니지만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보는 소위 '예능' 프로그램이 몇 개 있는데, 드라마 애호가인 엄마/언니와 취향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내 방에서 아이패드나 스마트폰으로 혼자 티비 프로그램을 보곤 했다.
혼자 호텔방에 묵게 된 지 며칠 안 된 어느날 밤, 새로 시작한 모 예능 프로그램이 웃기다는 실시간 후기가 막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이거 어떤지 나도 한 번 봐야겠다.'
습관적으로 계속 아이패드와 아이폰의 방송시청앱을 눌러댔지만 반응이 없다.
나중에 며칠 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거지만 내가 묵었던 그 호텔은 밤에 몇 분간 와이파이가 잘 연결이 안 되는 시간이 늘 있었다.
'아고, 사람들이 재밌다는데 하필 왜 와이파이 안돼? 결국 못 보겠네'
몇 분 뒤,
나는 그 호텔방에서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내 호텔방에는 내 TV가 있었다. 리모컨과 함께 얌전히 켜지기를 기다리는....
뭔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ㅎㅎㅎ
늘 스마트폰 앱으로 TV프로그램을 보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니
눈앞에 나만을 위한 티비가 있어도 그걸 켜서 내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오직 나의 선택만을 기다리던 내 티비도 그립다.
돈 벌어서 독립을 하지 그러냐? 라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호텔 생활의 장점은 청소도, 요리도 내가 할 필요 없다는 점😆
정말 모든 세상사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혼자 여자라서 사실 힘든 것도 있었고 걱정을 많이 했지만, 만약 동료 여자가 많아서 누군가와 같이 방을 썼다면 그 시간이 평화로운 2주일로 기억되지도 못 했을 거고, 이 방이 그립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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