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컬렉션




아주 어릴 적에, (슬프게도) 아주 오래 전... '마지막으로' 내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괜시리 나를 너무 괴롭히는 아이가 있었다. 공부도 잘 하던 아이였는데 그렇게 나를 괴롭혀댔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클리셰'같은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던 나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생각없이 학교에 등교했는데 그날 아침부터 우리 반에선 "공식적으로" 그 남자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걸로 되어있었다. 내가 아직 등교하기 전에 그 애가 무슨 선언이라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등교하고 나니 웅성웅성하는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쟤가 너 좋아한대."

그리고는 그 아이는 꾸준히 날 좋아했고, 난 반응이 없었다.
그 애는 나를 좋아한다고 선언한 첫 남자아이였고, '이상하게도' 난 그 4학년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 많은 남자애들이 나를 좋아했었고, 남자애들 사이에서 나의 뺨을 한 번 만지고 도망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너무 너무 짜증나고 힘드는 일이었지만(아마 울며 저항하기도 했겠지만), 그 유행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야구부였던 남자애의 거친 손바닥 느낌이 가장 싫었다. 하루에도 여러 명이 나의 뺨을 스윽 만지고 도망가는 일을 겪어야했다.

4학년이 끝나갈 무렵, 학예회 비스름한 행사가 열리고 마지막으로 반 전체 단체 사진을 찍는데, 대여섯 명이 남자애들이 서로 내 옆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기 위해 난리가 벌어졌다. 그 남자애들 틈에서 내가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그대로 찍힌 사진이 있다. 내가 인기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얼마 안 되는 증거물이라고나 할까.

나를 좋아한다고 첫 선언한 그 남자애와 심지어 5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그 남자애의 엄마도 나의 존재를 알 정도가 되었지만 5학년 때도 별달리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여기저기 다른 애들로부터 "XX가 널 좋아한대" 소리를 듣던 5학년을 마치고 나는 서울의 거의 반대편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는 무존재가 됨ㅋㅋ.

헤어지면서, 그 남자아이에게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는데 거기에는 본인의 사진도 한 장 들어있었고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맞춤법이 엉망인 쪽지도 한 장 들어있었다. '아니, 우리 반 남자애들 중에 가장 공부 잘 하는 남자애인데 맞춤법이 이게 뭐야??" 경악스러웠던 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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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오랜 만에 이 이야기를 또 하게 되었다.
나의 유일한 인기있던 시절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친구도 몇 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그 맞춤법이 엉망인 쪽지가 생각 나서 그 남자애가 마지막 선물로 준 책을 찾아내어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맞춤법이 하나도 틀리지 않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내 기억이 이렇게 불완전한 것인가? 아닌데? 나 맞춤법에 경악한 쪽지 확실히 봤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입맛대로 기억을 만들어낸다고는 하지만 어째 이럴 수가 있지? 하면서 놀라면서 잠자리에 누웠다. 아니, 누워서 테니스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맞춤법이 엉망인 쪽지는 그 쪽지가 아니었다. 책 사이에 끼인 쪽지에는 "너의 이사가는 주소를 알려달라, 내가 너에게 편지하겠다" 그런 내용만 있었고, 내 기억 속엔 쪽지 하나가 더 있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상기해보는 일인데도 그 쪽지 내용이 스르르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충의 내용은 이랬다.

"선생님이 이 학기 마치고 전학가는 학생 손들어보라고 하셨을 때 니가 손 드는 걸 보았다. 그때부터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전학 가더라도 꼭 나를 기억해달라."

여기에 내가 기억에 따라 대충 옮길 때는 맞춤법을 제대로 썼지만 실제 그 쪽지는 모든 맞춤법이 엉망이었고, 다른 내용 중에 "같이"를 써야 할 곳에 "갚이"를 쓴 게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기억한다. '어떻게 이렇게 맞춤법이 엉망인 애가 남자 1등일 수가 있지??'



그러니까 이런 내용의 쪽지가 하나 더 따로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쪽지는 십 수년째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십수년째 볼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위에서 말한, '4학년 때 남자애들이 서로 내 옆에서 사진 찍으려고 몰려들어서 내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진' 말이다. 대체 이 사진도 내 어릴 적 사진 앨범에서 딱 그 사진만 떼어내져 있었고 그 뒤로는 어디다 뒀는지 찾아볼 수가 없다.


피식.
쓴웃음이 난다.
아마도 내가 누구에겐가 자랑하기 위해 그 사진을 따로 떼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애가 떨리는 마음을 써내려갔던 그 쪽지도 함께 어디엔가 따로 보관을 했을 것이다.

초등학생 이후로 남자애들에게 인기있었던 적이 없어서
"한때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라는 걸 증거로 남기기 위해,
어디엔가 나의 "자존감 컬렉션"을 만들어놓은 것일 텐데
십수년째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ㅋㅋㅋ
아마 잘못 취급되어 이미 버려졌을 수도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도 안 믿어줄 나의 '자존감 컬렉션'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고도 슬픈 일이다.
그 뒤로 얼마나 인기가 없었으면 초딩 때 일을 붙들려고 ㅎㅎ.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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