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던 이유




난 대학교 졸업 무렵까지만 해도, 집밖에서는 잠을 못 자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한 방당 20명 넘게 집어넣는(!) 경주 "여관"시설의 더러운 이불을 보고 
처음 이틀 간은 내 옷을 꺼내 깔고 덮고 잤다. 물론 이불이 원래 부족하기도 했기 때문에 유난스레 결벽증처럼 튀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땐 한 반 학생이 50명이 넘었으니까. 그러나 3박 4일 마지막 밤에는 지쳐서 그냥 숙소 이불 속에 섞여서 잤던 걸로 기억.

대학생 때는 역시 집밖 숙소 기피증으로 인해, 엠티 같은 것도 많이 가지 않았고
만약이라도 가게 되면 내 "주특기"를 이용해 밤을 그냥 새웠다. 그래서 이불이 필요없었다.
나는 원래도 밤을 잘 새지만, 술을 마셔도 끝까지 살아남는 편이었다. 어떤 것에도 머리를 대지 않고 그대로 집에 돌아오는 법을 택했다. 


집 밖 숙소는 왠지 더러운 것 같아, 잠을 전혀 못 자던 것은 해외봉사단 생활을 하면서 자동으로 극복이 되었다.
물론 내 집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문화 생활을 하려면 수도에 꼭 나가야 했다. 수도에 나갈 때마다 묵는 유숙소, 그리고 각 지방에 놀러갈 때마다 있던 각 단원의 집.... 결국 아무데서나 잠드는 생활에 익숙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베개는 왠지 꺼림칙해서 내 수건이나 내 옷을 베고 자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냥 숙소 침구를 믿고 그냥 잔다. 그리고 이젠 늙어서 술을 많이 마시면 곯아떨어지는 나이가 되었다.



2014 London hostel. 원래는 호스텔 첫 숙박 기념으로 찍어둔 사진이지만,
베개 부분에 내 티셔츠가 펼쳐져 있는 걸 보면 나의 습관을 알 수 있다.😜




집밖에선 잠도 못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사람에서 
늘 "없는 살림"에 돈을 쪼개 아무 목적없는 홀로 호텔 숙박을 좋아하게 된 나... 그 이유가 뭘까.
그냥 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존재라 아무도 없고, 어떤 방해도 없는 공간이 좋아서 그런게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최근에도 5박짜리 홀로 여행을 즐기고 와서, 다시 집 생활에 적응(?)하려니...
내가 호텔 숙박을 하면서 은근히 즐기고 있던 게 뭔지 새삼 깨달았다.
그건 바로 깔끔한 화장실/욕실이 옆에 딸려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넓은 집이 전혀 아니지만, 아무튼 가족 중 누구보다 내 방에서 화장실이 제일 멀다.
나는 선천적으로 안좋은 장을 타고 태어나서 (예전에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의사가 타고 난 것이니 그냥 적응하고 살아야 된다고 했었다😢) 새벽 설#가 잦은 편인데... 그냥 내 방 옆에 화장실이 있었으면 싶다. 그리고 그 민망한 사운드가 아무에게도 안 들리면 좋겠다 ㅎㅎ.

그리고 나는 샤워를 아주 좋아하는데, 우리집 욕실은 2개가 있지만 둘다 샤워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다. 
우리 엄마와 언니는 신기할 정도로 샤워를 자주 안 하는데🤔 비교적 깔끔한 외양을 유지하고 산다. 아마 어릴 적부터 샤워 간격을 길게 가져왔기에 거기에 신체가 적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나머지 두 사람은 욕실 환경 개선에 관심이 없다. 

또한 물욕이 상상을 초월하는 언니의 잡동사니로 인해, 우리집 거실 욕실은 너무나 지저분하다. (한 번에 샴푸를 8가지 종류를 사놓고 돌아가며 씀, 그외에도 안 씻는 사람치고는 잡다한 목적의 세정제를 많이 보유함. 사용기한이 지나면 버려야 하는데, 물건 주인이 그걸 안 하고 또 없어지면 없어졌다고 난리이니... 물건들이 모두 갈 곳을 잃은 채 너저분하게 몇년째 욕실에 늘어서 있음) 찍소리도 못하는 막내로서는 그냥 눈치 보며 매일 한 켠에서 샤워를 할 밖에.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호텔 화장실은 여러 사람의 손길 발길이 닿은 곳임에도, 우리집 화장실보다 깔끔하고 안정감있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원하면 금방 화장실 변기에 도달할 수 있고, 1박 2일간 욕조 목욕을 3번 즐기며... 너른 공간에서 여유있게 바디 로션을 바르고... 내가 호텔에 머무는 걸 즐기던 숨은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구나 싶었다.





침대 바로 옆 나만의 화장실.... ㅜ.ㅜ


누군가는 호텔에 돈 퍼붓지 말고, 빨리 제대로 돈 벌어서 좋은 집으로 독립하라고 그러겠지.😥
이 문제는 진짜 '혼자 있는 것'이 중요한 해결책인 것 같다. 만약 파트너가 생긴다 해도, 타인의 화장실 취미는 알 수 없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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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숨은 이유는 최후의(?) 도피처를 만들어놓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가끔 "저 지금 부부싸움하고 그냥 집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서 제 차 안에 있어요. 어쩌죠? 갈 데도 없고, 친정은 안 되고 다시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이런 글을 볼 때마다 호텔 멤버십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게 뭔가 위안이 된다. 부부싸움할 남편은 없지만 🤓. 
정말 못 참아서 어딘가로 혼자 숨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장 돈 한 푼 없더라도  3개의 서로 다른 호텔 체인에 잘 배분하면 6박 정도는 무료 숙박할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게 참 안심이 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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