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컵라면 먹던 파비아노가 그랜드 슬램 킬러로?? 🤗





2012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삼성증권" 후원 챌린저 테니스 대회에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삼성증권을 굳이 쓰는 이유는 다음에...ㅋㅋ) 

이 대회에는 여러 외국 선수들이 드나드는데... 보통 세 자리 수 순위를 가진,
티비 중계에서는 볼 수 없는 무명 선수들이 포인트를 쌓아서 상위 무대 -투어 레벨-에 도전하기 위해 거쳐가는 대회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내년에 서울에서 또 보자~~" 이런 인사를 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사실 테니스 선수의 꿈은 챌린저 대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이 대회에서 다음엔 볼 수 없게 되어야 더 다행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선수가 이탈리아 출신 토마스 파비아노 선수인데,
몇 년 전에는 윔블던에서 와린카를 꺾어서 깜짝 놀라게 만들더니,
올해 윔블던에서는 치치파스, 어제 끝난 US오픈 1회전에서는 세계 랭킹 4위 도미닉 팀을 꺾어 또 놀라게 했다.
도미닉 팀이 최근 병으로 고생을 해서 상태가 안 좋긴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테니스 경기장인 아서 애쉬 스타디엄에서 top 4 선수를 꺾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2012년에 이 선수가 기억에 남은 이유는 경기력 때문이 아니고... (나는 토너먼트 데스크에 있어서 경기는 하나도 못봄)
컵라면 때문이다.

나는 외국에서 ATP 250 대회 자원 봉사를 먼저 해봤는데, 그 경기장에는 선수용 뷔페 식당이 차려져 있었다. 물론 자원봉사자는 거기서 식사를 할 수 없지만 지나다니며 분위기를 볼 수는 있었고 모든 대회가 다 그런 식당을 운영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단계 낮은 서울 챌린저 대회에 와보니 선수들 식사로 샌드위치 제공이 전부였다.
그래도 나름 유명한 '마마'스 샌드위치'에서 주문한 햄샌드위치와 참치 샌드위치가 선택의 전부.
대부분 나이 어리고 덩치 큰 챌린저급 선수들을 보며 "어머, 샌드위치만 먹고 어떻게 운동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프로 선수들 세계에서 각 단계마다 큰 격차를 두지 않으면, 상위 단계로 올라가는 동기 부여가 안 된다는 스포츠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챌린저 대회에서도 넘치는 대우를 받는다면 거기 안주할 선수들도 많겠지.


대회가 중반으로 접어들던 어느날
파비아노 선수가 호텔로 돌아가기 전 토너먼트 데스크에 왔는데, 오늘도 여전히 두 가지 옵션 밖에 없는 샌드위치에 질렸는지 그냥 안 먹고 가겠다고 말했다.


토너먼트 데스크 뒤쪽에는 자원봉사자 전용 간식으로 컵라면과 과일 등이 쌓여 있었다.
선수들 제공용은 아닌.... 
거기서 다들 귤을 까먹고 있는데 한 여자 선수의 어머니가 와서 우리도 귤 좀 주면 안되냐고 한 적도 있었다. ㅎㅎ 



173cm로 테니스 선수로서는 작은 키인 토마스 파비아노




다른 선수에 비해 체구도 매우 작은 파비아노 선수가 샌드위치 하나 못 먹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왠지 짠했던 나...
선수들을 불러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불러야 할 지 몰랐으나
다급하게 성을 불러봤다.

"파비아노!!"

다행히 그 선수가 돌아봤다. 
이거 코리안(?) 컵라면인데 이거라도 먹어볼래?? 물 부어서 먹는 거야. 좀 매울 수 있어.

그는 예상 외로 라면을 먹겠다고 했고, 또한 예상 외로 그걸 들고 호텔행 버스를 타고 가버렸다.
그래도 경기장에 있는 선수용 방에서 먹을 줄 알았는데?! 뜨거운 걸 들고 가다니?!


다음날부터 그 라면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지 몇몇 선수가 심심치 않게 토너먼트 데스크에 찾아와 라면을 달라고 했다. ㅎㅎ 맵지 않은가봐?? 


얼마 뒤, 호텔과 경기장 간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분이 오시더니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이거 삼성증권 사원들 통근 버스예요. 낮시간 동안만 지원 나와서 선수들 태우는 거고....
버스 안에서 음식 냄새 나면 직원들이 아침에 나보고 뭐라고 하니깐, 선수들 라면 좀 못 먹게 해요"


오홍, 또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그래서 다음부터는 버스 내 컵라면 취식 금지.🍜 ㅎㅎ


아무튼,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소리쳐 불러보고 라면 건네줬던 선수가 어느새 성장해서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유명 선수들을 꺾고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하다.
이것이 챌린저 대회의 재미겠지.

기록을 찾아보니, 파비아노는 2017년까지도 한국에서 챌린저 대회를 뛴 것으로 되어있다.
사실 챌린저 대회에서 파비아노처럼 투어급으로 올라서는 것은 쉽지 않다.
앞으로도 좋은 경기 많이 보여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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