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On21



나달 패배에 대한 생각들.

예전에는 며칠씩 우울하고 그랬는데, 이젠 영향을 덜 받는다. 기대도 안했던 그랜드 슬램 우승 "20"이라는 숫자를 이미 채우기도 했고, 그동안의 감동으로도 충분한 14년이었으니까.


나달은 이번에 그랜드 슬램 21회 우승이라는 유일무이 대기록을 정조준 중이었는데, 그동안 나달이 누구나 기대하던 기록을 한 번에 갈아치운 적이 없어서 아마 이번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고 미리 맘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어제 실망을 덜 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에 그 당시까지 페더러(17회) 제외 최다 슬램 우승기록이었던 샘프라스의 "14회" 우승에 도전할 때도 결승전에서 한 번 재수를 했다. (2014 호주오픈 주최측에서 그 도전을 기념하기 위해(맞나?) 먼 미국에서 대외활동 거의 없는 샘프라스까지 시상자로 모셔왔는데, 결승에서 나달 부상* 발생. 샘프라스는 다른 사람에게 트로피 줬다) 롤랑 가로스 La décima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에 다가갈 때도 2015, 2016 두 번 결승도 못가고 미끄러졌었다. 

2013년 US open 두번째 우승 이후, 나달의 모든 팬들이 가장 고대하는 기록이 된 "더블 커리어 그랜드 슬램".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호주 오픈 우승 하나만 필요했지만 2014년 이후 결승에서 3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나달의 가장 최근 호주오픈 결승이었던 2019년 결승에서도 워낙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또 주최측이 나달의 더블 그랜드 슬램이 유력하다고 보고 더블 슬램 선배들인 로드 레이버/로이 에머슨을 결승 시작 전 트로피 행사에 등장시켰으나 🤝 나달의 결승전 대패로 시상자로는 뜬금 이반 렌들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때 나달이 우승했으면 시상자로 렌들 아닌 레이버/에머슨이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 21회 우승도 언젠가는 이룰 거지만, 이번 한 번 도전에 덥석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클레이 시즌의 시작과 함께 더블 폴트가 너무 많아졌는데, 중계를 보면서 '저 서브로는 올해 우승 못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달이니까 롤랑 때까지 반드시 고칠 거야..라고 생각했었고 실제로 로마 오픈 때는 서브 문제가 거의 없어져서 "역시..." 하고 안심했었는데, 롤랑 8강 슈와르츠만 경기부터 다시 더블 폴트로 흐름을 내주는 일이 생겼다.

서브가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은 클레이 코트이지만, 올 시즌에는 유난히 중요한 흐름을 끊어먹는 더블 폴트가 많았고 그것 때문에 게임을 내주거나 심지어 세트를 내줘서 체력 부담이 증가했다. 팬 의견들 중에 4강전에서 서비스는 큰 문제가 아니었고, 백핸드에서 밀리면서 패배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나는 결국 더블 폴트가 큰 재앙을 불러왔다고 생각한다. 사실 백핸드가 약점인 것은 2014년 조코비치와의 롤랑 결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조코비치가 나달 백핸드 쪽으로 계속 보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에러가 나던 경기였다. 그래도 그때는 올해처럼 더블 폴트를 8개씩 하지도 않았고 나달 경험치의 우위와 함께 쨍한 낮경기이기도 했기에 이겼다. 더불어 조코비치의 백핸드 에러도 눈에 띄던 경기.

이번에 no.1 조코비치도 나달과의 롤랑 경기에서는 생각보다 엄청난 압박을 느낀다는 걸 새삼 알게 됐고, 그래서 조코비치 게임 브레이크도 많이 했는데, 나달까지도 자기 서비스 게임에서 자신감을 잃으니 기껏 뒤집어 놓고 다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롤랑 시작 전 이번 클레이 시즌 서브 문제에 대해 나달도 심리적 문제였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올해는 계속 타이브레이크에서도 승부처에서 더블 폴트가 나오니 😰 쉽게 포인트 선물하고 난 후 심적 부담과 체력적 부담이 증가해서 계속 말아먹는 형태 ㅜㅜ

준결승전에서 90분이상 소요된 3세트가 역사상 최고의 한 세트였다는 트윗을 많이 봤는데, 나는 브레이크가 난무하면서 시간이 길어진 이 세트가 사실 둘다 늙었고 둘다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지 잘 보여준 세트였다고 생각한다. 나달은 늘 "슬램 최다 우승 기록 세워서 역대 최고 선수가 되는 것은 나에겐 그리 중요치 않다"라고 말해왔는데 (hypocrite! 라는 악플이 많이 달림😝) 대회가 끝나고 보니, 나달이 뭔가에 눌려 심적 부담이 굉장히 컸던 대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1년내내 벌어지는 테니스 대회 중에서 모든 대회를 압도할 수 있는 조코비치가 "도전자"의 자세로 이것저것 전술을 실험해가며 덤비는 단 하나의 대회라는 부담도 있을 테고.

예전에는 나달에게 드로가 무슨 소용이냐 다 패고 올라가는데...이런 식이었다면, 이제는 체력 문제 때문에 그랜드 슬램 대회 드로 배정과 경기 시간 배치가(낮 경기가 유리) 너무 중요해졌다. 롤랑 전에 나달이 랭킹 3위가 되면서 조코비치와 결승이 아닌 준결승에서 붙을 가능성이 높아졌는데, 많은 팬들의 반응이 "차라리 낫다. 준결승이 부담이 더 적다" 이런 식이었다. 나도 시작 전에는 살짝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과가 나오고 보니 결단코 최악의 상대와는 해가 쨍쨍한 낮경기로 시작하는 결승전에서 붙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달은 클레이 코트에서 헤매는 모습은 주로 야간 경기에서 보여줬다.


또한 2020년 롤랑처럼 무실세트로 압살하면서 올라가지 않으면 8강 4강 경기에서 '그 나달'도 집중력을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메이저 대회 2연속 역전패. 
'마지막 세트 가면 경험과 체력에서 앞서는 나달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것도 2019 us open이 마지막 불꽃이었던 듯. 

팬들 트위터를 보면 다들 벼라별 푸념과 징크스를 털어놓고 있던데, 그 와중에 나만 혼자 생각하는 😜 '안 좋았던 징조' 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롤랑 가로스에서 우승자가 트로피를 건네받을 때 트는 음악이 있다. 나달이 거의 매년 우승했으니 사실상 1년에 한번씩 공식적으로 들어왔던 셈인데, 가끔 유투브 재생하다가 우연히 그 음악이 들리면 눈물이 찔끔 할 정도로 혼자 감동하는 음악이다. 🥺 

그런데 올해 롤랑 가로스 측에서 나달의 13회 우승을 기념하여 동상을 세워줬는데, 그 동상 제막식에서도 잠시 그 음악을 틀었다. 항상 롤랑가로스의 마무리는 그 음악과 트로피와 함께였는데, 이번에는 대회 시작 전부터 그 음악을 트는 바람에 그때 한 번 듣고 우승없이 끝났나보다. 췟! 그 음악 아무데서나 틀지 마....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니었군...😒



그리고 내 방에서 와이파이를 잡아서 랩톱으로 4강전 경기를 보는데 갑자기 연결이 끊어지면서 거실에 나가 잠시 티비로 봐야하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인터넷 연결 다시 시도하느라 경기를 못보는 동안 경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기울어진 것도 아쉽다. (미신 ㅎㅎ)

작년에 너무 압도적으로 우승을 해서 "이야, 욕심 안 내려고 했는데 이거 이 정도 수준차와 경기력이면 내년에도 우승을 또 해야지 못하는 게 너무 억울하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consistency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운 나이가 된 나달. 경기 지켜보기가 안타까운 순간이 많아질 거라는 걸 이제 인정하고 담담하게 지켜봐야겠다. 

그래도 21회 이상 우승을 할 거 같긴 한데?!?!? 
ㅜ.ㅜ 



* 2014년 결승전 워밍업 과정에서의 부상. 
이 글을 다 써놓고 트위터 외국 테니스 팬들의 성실한 토론의 장을 흥미롭게 읽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2014년의 그 부상 이후로 나달이 예전의 나달이 아니라는 댓글을 봤는데, 슬프지만 맞는 말 같다. 심리적 위축이 왔다. 소위 "Clutchdal"이 힘들어진 것.

컨디션 좋게 올라온 나달이 당시 결승전에서 갑작스레 허리를 잡고 아파하면서 많은 의문을 자아냈었다. 게다가 상대방의 부상을 알고서도 경기하는 것에 대한 바브린카의 부담감 때문인지 경기가 느슨해지면서, 심지어 부상 중이라는 라파가 한 세트를 가져가기까지 하자 모든 hater들의 " 나달 멀쩡하잖아? 질 것 같으니 꾀병이지"라는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메디컬 타임 아웃의 사용 방식에 대해서도 욕을 먹었고.

하지만 꾀병이 아니었던 그 부상 이후 2015, 2016 나달의 암흑기가 열렸고 심리적으로 밀리는, 자신감을 잃는 모습까지 보여줬었다. 그리고 그뒤로 인터뷰에서 굉장히 방어적이고 모든 부상 관련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선수가 된 듯 했다.

그 트윗을 보고 나서 2014년 호주오픈 생각하니 새삼 애석하다. 

 

댓글

  1. 오랜만에 이 글을 다시 보니, 2022년에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네. 5세트에 가서도 여전히 유리한 건 나달임을 보여준 경기가 몇 개 나왔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것이 정말 힘들어질 나이가 될 테지만 아무튼 올해는, 나달을 위협할 만한 그랜드슬램 결승급 선수들의 키가 모두 193cm이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이들이 큰 키의 서브봇들이 아니고 굉장히 열심히 뛰어다니며 수비를 하는 스타일의 선수들이라는 거. 체력 소모가 너무 커서 결국은 더 젊은 이 선수들이 먼저 힘이
    빠진다는 게 노장 선수를 응원하는 입장에서 너무 다행이다. 물론 이 선수들 팬은 경기보다가 같이 힘이 쭉쭉 빠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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