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압감



캘린더 그랜드 슬램에 도전했던 조코비치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덩달아 만감이 교차한다. 
Non-조코비치 팬이라면 지긋지긋했을, 그의 결승전 무적 모드...그것과 완전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며 대업 도전 실패.

그가 그랜드 슬램 21회 우승을 하지 않길 바랐던 것은, 내가 10여 년 넘게 '아들 키우는 심정'으로 응원해온 나달 때문인 것도 있겠으나 어느 정도 내 인생의 투영인지도 모르겠다. 

나달 본인은 "역대 최고"선수로 남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으나 나로서는 2등은 싫었다. 고등학교 때 두어 번 단 1점 차이로 2등을 했던 기억, 결국 진학한 2등 학교. 노력을 크게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그게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도 만년 2인자 삶을 살다가 1등도 눈앞에 보였는데, 좀 괜찮아질만 하니까 갑자기 추월을 당해 다시 2인자로 남게 된 상황이 그래서 더욱 더 싫었다. 사실 이미 거의 모든 지표에서 조코비치가 앞서지만, 그래도 나달이 먼저 한 번은 역대 1등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났나 보다. 대리 만족.


이번 us open에서도 결승을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이 조코비치의 우세를 점쳤다. 물론 결승까지 무적모드로 올라온 메드베데프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지만 조코비치가 너무나 갈망해온 목표라는 점, 그걸 이루기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는 선수라는 점, 메이저 5세트에서의 그의 강인함 등등이 조코비치의 승리를 점치게 만들었다. 

나도 반쯤은 마음을 내려놓은 상황이었지만, 메드베데프의 경기를 몇 개 보고 조코비치의 들쭉날쭉 경기 스코어를 보고 나니... 메드베데프가 우세하겠다 싶기도 했다. 이런 건 경기 전에 써뒀어야... :) 

결정적으로 이번에 조코비치의 심리 상태나 몸 상태가 저번 롤랑 가로스 4강전의 나달의 그것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결국 "그때 나달 = 이번 조코비치"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나달이 2020년 롤랑 가로스의 압도적인 우승 기억과 2021 대회 직전 로마오픈에서의 선전으로 상당히 자신감있게 롤랑 가로스에 임할 줄 알았었는데... 끝나고 보니 그가 상당한 압박감으로 고생한 대회였다는 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당시 4강전을 앞두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나달의 우세를 점쳤었다는 것도 이번 us open의 조코비치와 비슷했다.

롤랑 준결승 때 대부분이 나달의 우세를 점쳤으나, 롤랑에서는 가진 게 더 많은 나달이 더 허둥댔고(狼狽;;😨) 결국 조코비치가 승리했듯이... 이번에도 다들 조코비치의 우세를 점쳤지만 너무 거대한 역사에 도전하는 조코비치가 중압감으로 오히려 더 약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그것은 현실화되었고, 특히나 준결승에서 더 고생하고 올라온 조코비치가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헤매기 시작... 결승전은 짧게 끝이 났다. 


내가 왔다갔다하는 수많은 넥젠 중에서 "하~ 이놈 봐라?" 하는 식으로 메드베데프의 존재를 제대로 인지하게 된 것이 2019년 바로 그 '조코비치'와의 호주오픈 16강전인데... 
만 22세 당시에도 조코비치의 공을 끝없이 받아넘기는 기술만은 가지고 있어서 질 시몽의 후예가 나온 줄 알았었다. 하지만 그해 북미시즌부터 연말까지 메드베데프는 질 시몽의 후예 정도가 아님을 보여줬고, 하드코트 슬램에서 조코비치를 잡는다면 메드베데프 밖에 없겠군...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메드베데프는 올해초 2021년 호주오픈 결승전에서 너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결승까지 모든 상대자들을 무력하게 만들면서 신들린 모습으로 올라온 것은 알겠는데... 막상 결승에서 조코비치에게 스코어가 밀리자 화를 내고 공을 막 쳐버리면서 1시간 50분여만에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니, 저게 세계 최강자를 대하는 모습인가? 애초에 스코어가 밀릴 거라는 가정을 하고 어떻게 뒤집을지 전략을 세워서 올라왔어야지, 스코어가 밀리니까 대책이 사라져버리는 저 경기 운영은 뭐지?!?' 

그래서 메이저 대회에서는 메드베데프에 대해 큰 기대를 버렸었는데, 본인도 그때부터 얼마나 절치부심을 했는지...이번에는 완벽한 경기 준비를 해서 나왔다. 패배를 눈앞에 두고 관중의 격려와 환호에 눈물을 쏟아낸 조코비치를 보며 짠한 마음이 들기도... 그저 관중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년 1월, 이들의 도전은 다시 시작될 것이지만...
나달 팬으로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이제 20대 중반에 들어서는 후배 선수들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하고, 나달은 신체가 쇠퇴기라...

그래도 한 번은 1등 하는 거 보고 싶어. 지금은 메이저 우승 횟수로는 공동 1등이지만 다른 지표에서 밀려서 나달이 1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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