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를 직접 쳐본 적이 없어서, 경기 중계를 볼 때 선수들 공의 강도나 방향, 높이...이런 것에 대한 감은 없다. 테니스 쳐 본 사람들은 그냥 tv화면이라도 보기만 해도 알던데.
윔블던 준우승까지 했던 폴란스 선수 라드반스카가 은퇴하기 전, 늘 그녀에 대해서 "저 파워로는 슬램 우승 못한다" "한계가 명확" 이런 평을 하는 걸 많이 봤지만 사실 내가 경기 중계만 봐서는 그 차이를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3년, 올림픽 공원에서 실제로 그녀의 경기를 보게 됐는데...
(당시 내가 가진 100만 화소 아이패드 동영상으로 남긴 장면을 캡처한 것이라 잘 안 보이지만↓ 라드반스카 특유의 "앉은 자세로 받아치는" 장면이다.)
실제로 보니 정말 공이 너무 약한 게 보였다. 화면에서 보는 느낌과 확실히 달랐다. 상대 선수가 '빵!'하고 보내면 라드반스카의 공은 '뽈뽈뽈뽈~' 하고 힘없이 천천히 날아가는 느낌? 그러다 보니 상대 선수가 대응할 시간도 충분하고 받아넘기기에도 수월해 보이는...하지만 워낙 수비가 뛰어난 라드반스카였기에 결국 저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최근에 실제 관람을 하다가 또 이런 느낌을 받은 경기가 있는데...
바로 2022 롤랑 가로스 4강전 나달 :즈베레프.
첫 게임부터 나달이 브레이크 당하면서 약간 즈베레프에게 끌려가는 느낌이 강하던 세트였는데, 현장 직관을 하니 나달 공이 약한 게 두드러지게 보이던 세트였다. 즈베레프가 빵! 하고 때리면 나달 공은 슈우우 하고 천천히 넘어가는 느낌. 하지만 즈베레프의 공은 항상 엄청난 강도와 속도로 빡!하고 재빠르게 되돌아왔다. 원래 나달의 포핸드가 이런 약한 포핸드가 아닌데?!?! 그래서 '나달이 밀리나? 젊은 선수랑 경기하니 역시 힘에서 안 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하지만 경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차이는 눈에 띄지 않게 되었고, 경기 자체는 결국 나달이 앞선 채로 즈베레프의 부상으로 2세트에서 끝났다.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내가 궁금한 것은 1세트 그 공의 강도는 모두 나달의 계산이었나 하는 것이다. 이미 2022년 호주오픈 메드베데프와의 결승전 경험을 포함, 2m에 가까운 장신 선수들은 그만큼 에너지 소비도 많아서 5세트 내내 미친듯이 뛰다가는 결국 키 큰 쪽이 먼저 지친다는 것을 나달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메드베데프 - 즈베레프 모두 키 198cm로 나달보다 13cm나 더 크다.) 그래서 장기전을 예상하고 1세트는 그저 체력 안배를 위해 공을 살살 보내고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세트에서도 우월한 체력을 자랑하기에, 장기 체력전 고려 상대가 아닌 조코비치와의 롤랑가로스 최근 경기들을 보면, 나달이 항상 1세트 초반부터 총력으로 밀어붙여 점수 차를 크게 벌려서 기를 누르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즈베레프는 이 경기 2세트에서 '필립샤트리에'의 나달 게임을 4연속 브레이크하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세우긴 했지만, 나달의 파상 공세를 계속 막아내던 피로가 쌓여 3시간여 만에 결국 발을 헛디뎌 큰 부상을 당해 기권을 해야 했다. 그만큼 그도 체력을 많이 썼다는 뜻이다. 이 체력전은 나달의 계획에 있었을까, 아니면 닫힌 지붕에서 오는 습한 열기에서 경기가 제대로 안 풀려 나달도 그저 당황했던 거였을까?
사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의미없지만, 2022 호주오픈 결승전 1,2세트 때도 나달이 의도적으로 메드베데프를 그저 엄청 뛰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달이 상대를 지치게 만들고 5세트까지 갈 것을 작정하고 나왔다는 느낌마저 들었다는 뜻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나달은 진다는 생각을 안 했다. 경기 중에 스코어상으로 확 밀리면서 경기가 메드베데프쪽으로 기울어서 모두 패색이 짙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나달은 라켓 여러 개를 새로 해달라고 stringing room으로 보냈다. 경기가 계속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실제로 나달의 머리 속엔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 이 글을 쓴 뒤 오랜만에 '22 호주오픈 결승 4번째 세트 일부를 잠깐 봤는데 나달이 너무 지쳐 보여 '5세트까지 일부러라도 가자'라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겠다 ㅎㅎ. 하지만 1,2세트 생방송으로 봤을 때 '장기전 계획 중인가? 메드베데프 그저 엄청 뛰게 만드네'라고 생각한 건 사실이다.
올해 US오픈 16강전에서는 36세 나달이 20대 선수의 체력과 속도에 밀린다는 것을 시인하면서 깔끔하게 패배했다. 너무 아쉽긴 했지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결국 8강에 남은 선수들 중 최고령자가 "27세"였고, 8강전부터 그 남은 19세 선수 + 20대들이 공을 빵빵 때리고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경기를 보니 '나달이 4회전 통과했어도 남은 경기에서 어려웠겠다'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젠 체력 안배 한다면서 (정말 그런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1세트에 살살 쳤다가는 그냥 주도권이 넘어가서 다시 찾아오기 힘든 시절이 올지도 모른다.
나는 나달이 체력과 속도에서 모두 우위를 확보하고 코트 끝에서 끝까지 뛰면서 모든 것을 받아치던 시절을 봤기에 올해 US open이 이렇게 마무리되어도 아쉬움이 덜하다....하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이제 네트 건너편 20대 선수들이 저 끝까지 보내는 공을 따라가기를 포기하는 나이 든 나달의 모습만 잔상으로 남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올해 초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사치스러운 걱정만 하고 있다 :) 작년에 부상으로 하반기를 하나도 못 뛰고 날렸던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연말 마무리는 +++++++로만 할 수 있게 되기를!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