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나 여기나....

 


2020년말 해외여행이 거의 불가하던 시절, 채널을 이리저리 바꾸다가 갑자기 상하이 풍경에 끌려서 보기 시작한 중국드라마. 중간에 별 재미가 없어서 안 보다가 최근에 몇 편을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2년째 보다 보니, 중국 배우 얼굴을 하나도 몰라서 배우가 아닌 진짜 '그 역할'로 보여서 좀 더 실감나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사라졌다. 이제는 아무리 10억 인구의 중국이라도 주조연부터 단역 배우들까지 다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란 걸 알게 됐다. 

배우 얼굴이 익숙해지는 것의 단점은, 범죄 수사 드라마에서 용의자들이 등장할 때 익숙한 배우가 나오면 '아, 단역 배우가 아니고 좀 유명한 사람이니 저 사람에게 뭔가 혐의가 있겠구나.'라는 걸 알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 작품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나이브즈 아웃'이라는 헐리우드 추리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저 배우를 그냥 스쳐지나가는 역할로 쓸 리 없으니 저 배우가 범인이겠구나.' 하고 짐작했었다.

2020년 처음 중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는 배우들이 새롭고, 그 사생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극중 역할이 좀 더 쉽게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최근에 여자 주연이 남자 주연보다 실제로 17살 많은 중국 연애 드라마를 봤는데, 그 배우들이 나에겐 초면이다 보니 나이를 잘 모르겠어서 그냥 극중 설정대로 12살 연상의 누나 또는 그것보다 나이가 훨씬 덜 차이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얼굴이 익숙하고 그 배우가 쌓아온 연륜을 아는 한국 배우가 그런 역할을 했다면 당장 악플이 달렸을 것이다. '이모-조카 사이로 보여서 연인으로선 안 어울려요' '커플이 아니고 모자관계라도 믿을 나이 아닌가요? 캐스팅 실패' 이런 것들. 실제 화면에 보이는 나이보다는 '그 배우의 십수년 과거 활동'을 알기에 나이가 더 들어보인다. 하지만 중국 배우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으니 그냥 극중 설정대로만, 혹은 더 젊게 보였다.

또한

이미 부자라는 걸 아는 한국 배우들에 비해서 중국 배우가 가난한 역할을 하면 실제로 가난하고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정재의 평소 생활상을 아는 한국인들은 이정재의 '오징어 게임' 연기를 좀 어색하고 평범한 수준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정재를 몰랐던 미국인들은 그의 연기가 실제처럼 처절하게 다가와서 SAG, Emmy 남우주연상까지 안겨준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중국 배우도 샤넬 셔츠 입고 나와서 "집이 망했으니 돈 벌어야 해요" 이러고 있는 것을 보니 뭐 여기나 거기나 다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극중 원래는 부잣집 딸이었다가 빚을 뒤집어쓴 역할이었으니 샤넬 셔츠쯤 하나 남아 있어도 설정상 문제가 될 건 없으나... 맨 위에서 내가 예로 든 한국 배우도 해당 프랑스 브랜드의 ambassador였기에 극중 가난한 집 딸 설정임에도 배우 본인의 정체성을 감추지 못하고 슬그머니 비싼 백을 광고로 들고 나온 것처럼, 위 중국 배우도 샤넬의 ambassador라고 한다.🙎 극 속의 "한 인간"이 아니라 배우의 실생활이 드라마 속으로 삐적삐적 비집고 들어오는 것.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부친이 남기고 간 감당 안 되는 빚으로 고통받는 자신의 본모습을 새 남자친구에게 보여줄 수 없다며 여주인공이 울고불고 난 뒤 바로 다음 장면 ↓





샤넬 제품과 향수 쌓아놓고 쓰는 홍보 대사로 바로 변신하는 배우. 😜 여자 2명이 주연인 드라마인데, 다른 주연 배우는 극중 더 삶에 찌든 설정이었지만 배우가 구찌 ambassador이기 때문에 구찌 제품이 자주 나온다. 😎



전혀 그런 처지로 보이지 않았는데요?!?


2년째 봐서 이제 슬슬 아는 얼굴이 생기니 중국 드라마도 뭔가 신선함이 떨어져 재미없게 됐나보다.

결국 미모/혈연을 바탕으로 눈에 띄어 주위 온갖 남자들의 '뜻모를 발탁 낙하산' /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줄거리를 '여주인공 성장물' 이라고들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드라마도 다 보고 나니 "이거 뭐야?!?"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찌나 그렇게 다들 여주인공들에게 큰 돈을 턱턱 내주는지... 

하지만 아래와 같은 대사가 있기에 이 드라마가 살아남는다. 어쩌면 가장 핵심일지 모르는 대사를 남녀관계 사이에 '악역'으로 끼어든 클리셰 가득 설정의 조연 배우가 하고 사라지는 게 특이하다.



"别人看到的都是你人生的剪辑版,

便对你提出各种批判。 

只有你自己知道全部, 并且全部有多难"


-> "What others see is an edited version of your life, and they criticize you in various ways. You are the only one who knows it all, and how hard it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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