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버티세요



테니스든 가수든 뭐든
다들 대충 이렇지 않을까
제일 좋아하는 사람 1명, 선호하는 사람 4-5명, 니가 뭘 하든 뭘 안 하든 상관없는 사람 대부분, 슬슬 신경 긁는 짜증나는 사람 4-5명, 극혐 두어 명.


테니스를 보다 보면 자연스레 관심도별로 선수들이 나뉘게 되는데, 그 몇몇 중에도 늘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선수가 한 명 있다.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편이었으나 성인 무대에는 그 기대치만큼은 아주 성공적으로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현재 빼어난 랭킹을 가지고 있다.

한국 선수들 중에도 주니어 시절에는 세계에서도 한 손가락에 안에 드는 등수를 자랑하다가 제대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 순위가 죽죽 내려가서 결국 빛을 못 보고 사라져가는 선수들이 많다. 예전에는 왜 그런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주니어 시절에는 나이를 제한해서 또래 끼리만 대회가 있으니 또래 사이에서는 늘 세계 1등일 수 있는데, 성년이 되어 프로가 되면 모든 연령층의 대단한 선수들과 경쟁을 해야 하니 거기에서 진정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결론을 얻었다.

아무튼... 이 선수는 10대 후반에는 또래 중에서 제일 먼저 치고 나간 편이었는데, 현재는 큰 타이틀이 없이 지지부진하다.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다. 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데 잡히질 않으니 조바심에 자꾸 무너지는 것 같은데, 오늘만 해도 상대방의 게임에서 매치 막판에 30:0으로 앞서가며 좋은 흐름을 보였는데 (여기서 두 포인트만 더 따내면 브레이크 후 거의 매치 승리가 눈에 보이는) 거기서 30:30으로 따라잡히게 되자 갑자기 정신 대붕괴를 시작하더니 어쩌지를 못하고 주르륵 본인 게임까지 다 내주고 최종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내가 그 선수 열성 팬은 아니라서 크게 마음이 아프고 그렇진 않았지만, 관심권에는 있다 보니 경기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늘 느끼던 그 안타까움이다. 저렇게 착한 천성과 열정으로 무장한 청년이 왜 늘 결정적인 순간에 저렇게 흔들릴까. 그 선수가 평소에 할 말은 하는 용기를 지녔으면서도 늘 팬들을 위하는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인 탓에 더 애처롭고 안타깝다.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인 승부의 세계.

트위터를 하다 보니 그 선수의 열성 팬들이 울분을 토하다가 할말을 잃고 사라지는 상황까지 보이니까 그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도 안타깝다. 

돌이켜보니, 내가 나달의 경기를 최초로 보던 새벽에도 그랬다. 거대한 산과 맞서 끈질기게 5세트까지 끌고 가던 20대 초반의 그 모습,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에 응원을 시작했나 보다. '야, 이거 5세트는 해 볼만 하겠는데?' 라고 생각했는데, 브레이크 한 번 당하더니 (아마 사실 당시엔 브레이크가 뭔지도 모르고 봤을 것이지만) 어ㅓ어어ㅓ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5세트는 6:2로 패배하며 끝나고 말았던 게 희미하게 기억 난다. 이럴 수가?!? 💀 했던 기억.

그날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던 선수의 패배가 너무나 아쉬웠다. 분명히 4세트까지 팽팽하게 흐름이 좋았는데 5세트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집히며 끝나는 것도 신기했다. 오늘 본 경기도 그렇게 흐름이 순식간에 바뀌었기에,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중계를 지켜봤던 10여 년 전 나달의 그 경기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경기를 나달 팬이 된 시작점으로 잡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 뒤로 테니스를 계속 본 것은 아니고 정확히 1년 뒤에 같은 대회 같은 위상의 경기에서 최고의 희열을 맛보면서, 두번째로 본 경기에서 진짜 팬이 됐다. 나는 운좋게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competitor'를 첫눈에 골라잡아 오랜 시간 동안 ups and downs를 거치면서도 큰 기쁨을 누리는 행운을 가졌다.

그런데 한 발자국만 차분하게 더 가면 되는데 자꾸 무너지는 선수를 붙잡고 있는 팬들을 보니, 얼굴도 모르는 그들에게 내가 괜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행실 때문에 정떨어지는 선수도 많은데, 반대로 착해서 미워할 수도 없는 그 선수를 응원하는 그 사람들. 

"패배를 견디고 버텨보세요. 언젠가는 저처럼 좋은 날이 옵니다" 하기에는.... 나도 10여 년 테니스를 보아 오니, 결국은 기대치만큼의 성취를 못 이루고 은퇴하는 선수도 허다하는 걸 알게 됐다. '이 선수 오늘만은 다르다', '오늘만은 뭔가 된다' 라는 느낌을 2시간 내내 주다가 5분 만에 와르르 무너져 끝나는 걸 수년간 목격하는 게 테니스였다. 게다가 너무 견고한 big3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던 게 테니스이고.

나는 운좋게 '그놈의' big3 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와 다행이었지만, 그 3명이 너무나 장기집권을 하는 탓에 그 이외의 선수들 팬들은 [그랜드 슬램 우승]이라는 궁극의 희열을 맛보지 못하고 커리어 끝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매 그랜드슬램 대회마다 새로운 우승자가 나타나는 여자 테니스에 비해 남자 테니스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기분 좋자고 보는 스포츠인데, 내 선수가 종종 기쁨을 주긴 하는데 자주 좌절과 실망으로 끝난다면 '갖다 버려야' 하나? 그래도 끝까지 믿어봐야 하나? 견디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는 거... 남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일까? 사실상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데도?


요즘 나달이 첫 아들 탄생을 지켜보느라 테니스계에서 물러나 있어서 그런가... 
다른 선수 응원하는 남들 걱정까지 하면서 글을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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