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오염




아주 오래 전에 혼자 홍콩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여행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때는 무슨 일인지 피크 트램을 타고 올라가다가 옆자리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 피크 트램 좌석은 2+3형태였는데 어쩌다 2인 좌석에 나란히 앉게 된지라...
아마 그때까지의 내 해외여행이란, 대부분 누군가와 같이 가거나 친구가 살고 있는 곳으로 놀러가서 친구와 만나는 거였는데, 그때의 홍콩이 순수히 '혼자' 탐험하는 첫 도시여서 그랬었나보다. 혼자 여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 할아버지는 호주 사람이었고, "아내가 돌아가신 뒤" 호주를 떠나 6개월 동안 세계 여행을 하고 마지막 싱가포르-홍콩을 거쳐 이제 호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나한테 이메일/집 주소가 써진 명함을 한 장 주셨고, 호주에 놀러오면 연락해라...이런 실현 가능성없는 뻔한 말도 주고 받고. 같이 빅토리아 피크 정상을 둘러보고, 그런 것 까지는 좋았는데...문제는 그분이 내가 평생 처음 만나 본 호주 사람이었는데 도통 그 억양을 못 알아듣겠는 거다. 어찌 어찌 내가 질문은 하겠는데, 이 할아버지 하시는 답을 듣자니 '이게 영어인가 어느 나라 말인가' 😵‍💫싶었다. 자유여행자들끼리 만나서 반나절쯤 같이 돌아다니고 또 어느 시점에서 바이바이 헤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언어 장벽으로 이 동행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할아버지는 피크 트램을 타고 내려와서 아마 스타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쪽으로 건너간다며 계획을 말해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트램 타고 내려온 길에서 'atm에서 돈을 인출하러 가겠다'하고 슬그머니 동행 길에서 물러섰다. 지금이야 여러 나라 영어 억양에 대해 기본 지식이 있지만 그때는 도저히 호주 영어를 소화하며 같이 걸어다닐 수가 없었다.

십수년이 지나 이제는 모든 기억이 흐릿하지만, 최근에 갑자기 이 기억이 오염되는 걸 느꼈다.

인스타는 모르겠고, 페이스북을 하다 보면 동양인 남자 얼굴을 한 프로필 사진에 뭔가 그럴싸한 이력을 적어 놓고 다른 게시물은 거의 없는 이상한 계정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이른바 romance scam이라는 것인데, 그 메시지는 대부분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시작하더라.(영어로)

'나는 얼마 전에 아내를 잃었어'
'나는 아내가 내 친구와 바람 피우는 것을 목격했어'

으웩. 바로 차단.🥴

이런 로맨스 스캠에 낚여, 그 남자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큰돈도 송금하고 그런 여자분도 있다던데, 첫 메시지부터 '나 아내에게 버림받았어' '아내가 죽은 지 얼마 안 됐어' 이런 걸 보낸다는 것은 ... 이게 그동안 효과 있었던 방법이라는 거 아닐까. 대체 그냥 봐도 뻔한 이 거짓말에 속는 사람들이 진짜 있다는 건가? 

말을 먼저 건 것도 나였고 십수년전 거의 초중딩같이 보였을 나에게 그 할아버지가 무슨 의도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세월이 훨씬 지나... 모르는 사람에게 '아내를 잃었어' '아내가 바람 피워' 이런 접근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보니, 뭔가 오래 전 그 홍콩의 기억도 오염되는 기분이다. 이게 다 scammer들 때문이다.

현재의 편견이 과거의 지나간 기억을 다시 물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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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지구 봉쇄'에서 벗어나 슬슬 해외 여행 빗장이 풀리던 시절에 파리로 떠난 나.
출발 전 살펴 본 대부분의 파리 호텔 후기에 15m²의 좁은 방, 방에 짐을 펼 공간이 없다, 방이 너무 좁다... 이런 거 많이 봤었다.





도착 첫날에도 '너 좋은 방 줄게' 하더니 다른 방보다 2배 넓은 휠체어 사용자용 방을 줬고, 그 다음 호텔로 가도 예약 사이트에는 나오지도 않는 넓은 방을 또 받았다. 사실은 약간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휠체어 사용자용 accessible room' 은 넓은 방이긴 한데, 화장실 사용이 약간 불편하고 (샤워 부스가 없는 형태에 욕실이 넓어서 샤워하기에 추움) 나는 그 호텔 회원 point를 꽤 보유하고 있는 편이긴 했지만 엘리트 등급은 없어서 굳이 나에게 좋은 방 줄 이유도 없었고.🤔




위 사진 오른쪽 붉은 색 방에선 계속 수도관에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가 나서 방을 바꿨다. 방을 바꿔달라고 하니 직원이 '너한테 좋은 방 준 건데 왜?' 하긴 했는데 그냥 내가 고집해서 바꿈.
여행 후반부에 갔던 다른 호텔에서도 '업그레이드 해줄게' 하더니 내가 예약한 싱글룸 말고 더 큰 더블룸을 주긴 했는데... 그 방은 커넥팅 룸이어서 옆방 사람 목소리가 다 들려서 별로이긴 했다.

아무튼 첫날 머무른 노란색 벽을 가진 호텔은 진짜 기본 방이 좁은 호텔이었는데, 예약했던 것보다 거의 두 배 크기의 방으로 오니 뭔가 공간에 여유도 있고 창문도 두 개 있어서 더 밝고 복닥복닥하지 않아서 그냥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원래 예약했던 방 크기



그렇게 2년 정도 지나고.... 한국인들이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에서 누군가 분통을 터트리는 글을 올린 걸 봤다. 비싼 돈 내고 파리 시내 5성급 호텔에 갔더니 반지하 같은 곳에 있는 accessible room을 줬는데 방 내부에 고장난 시설도 많고 먼지도 많고 너무 기분이 나빴다는 것.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유럽 호텔에 갔다가 '동양인 푸대접'처럼 휠체어 사용자용 방을 받았다는 댓글이 달렸다. '휠체어 사용자용 방'이 그 호텔에서 나쁜 방인 것은 아님' 이라는 반박 댓글도 있었지만, 파리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갑자기 2년 전 내 경험도 다르게 느껴지지 시작했다.

'안그래도 당시에 코로나 직후 유럽/미주에서 동양인 혹은 중국인을 나쁘게 대한다는 경험담을 보고 걱정하면서 갔는데... 내게 줬던 방도 혹시 동양인 격리용이었던 건가?' 😑 

절대 뭐가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예전 좋았던 기억이 오염되어 괜히 기분 나빠짐.
이런 게 인종 차별의 함정이기도 함. '혹시..설마...?' 하면서 좋은 의도가 나쁘게 해석되기도 하고, 호의가 의심으로 바뀌게 되거나 진짜 나쁜 의도도 모르고 넘어가게 되기도 하고.


지나간 일이 또 다른 의미로 느껴질 때가 있는 걸 보면
어떤 것은 모르고 지나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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