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뜨거운 2014 윔블던








이 날은 여자 준결승 두 경기가 있는 날.
내가 런던에 머물렀던 날 중에 가장 날씨가 좋고 더웠던 (런던 올여름 최고 기온이었다고)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매없는 원피스를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윔블던으로.

여자 경기는 인기가 별로 없는지, 전혀 기다림 없이 그냥 모든 문을 통과해서 표를 사고 널널한 aorangi terrace에 자리를 잡았다. 샤파로바 : 크비토바의 여자 준결승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아직 1시간이나 남은 시간. 이 땡볕에 여기서 1시간 동안 뭐하지? 

그때 커다란 스크린의 전광판에서 "코트3의 자리는 널널하고 표 없이도 입장할 수 있습니다." 라는 공지가 자막으로 나왔다. 코트 3에 가봐야 겠다고 결심하고 잘 잡아놓았던 자리를 떠남.


코트 3에 들어가니 Sara Errani (ITA) Roberta Vinci (ITA) VS Ashleigh Barty (AUS) Casey Dellacqua (AUS) 여자 복식 8강전 경기가 진행 중.
오! 선수들이 꽤나 가깝고 경기 보기가 상당히 좋게 설계가 되어있었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자리를 바꿔 가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관람.

단식에서도 종종 성과를 내곤 하지만 복식을 잘 하는 선수로 알려져 있는 사라 에라니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빠른 움직임과 기합 소리, 구석구석 잘 꽂아 넣던 위너로 인해, 경기장에서 거의 에라니 밖에 안 보였다고나 할까.


내가 경기를 지켜보고 실력을 확인한 이 두 선수가 결국 2014 윔블던 여자 복식 우승을 차지해 기쁘다.
코트 3를 봤으니, 이제 코트 2로 가볼까? 기회 되면 코트 1이랑 센터 코트에도 들어가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코트 2로 이동하니 남자 복식 8강전이 진행중.Vasek Pospisil (CAN) Jack Sock (USA) VS Alexander Peya (AUT) Bruno Soares (BRA) 의 경기였다.

Pospisil은 예전 나의 포스팅(cyworld.com/hwangmiya/9036808)에 잠깐 등장한 적이 있는 선수이고, 나머지는 이름만 알고 얼굴은 구별 못 하는 선수들.


코트 2는 코트 3보다 좀 더 크고, 주위 전경과 영국 국기가 잘 어우러져 정말 예쁜 테니스 코트였다.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선글래스를 쓰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말그대로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가며 이들의 경기를 봤다.
테니스는 랭킹이 정직하게 적용되는 종목이기도 해서, 2번 시드를 받고 나온 Alexander Peya (AUT) Bruno Soares (BRA) 가 분명 더 잘해야 하는데 예전에 같은 조로 뛰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는 북미의 신예 선수들 pospisil과 sock이 경기를 조금씩 압도해나가고 있었다. Pospisil은 90년생, sock은 92년생. 젊은 선수들이 10살 많은 선배님들을 당황시켜가며 신나게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유망주들의 사진을 찍어놓는 것은 언제나 쓸모가 있지...하면서 이 선수들만 몇 장 더 찍었는데, 결국 이들이 남자 복식 결승전에서 무려 '브라이언 쌍둥이'를 5세트 만에 꺾고 우승했다. 내가 다 뿌듯뿌듯. 7월 5일 복식 결승전 때 마지막 세트 경기 중계를 호텔에서 지켜보며 괜히 내가 기뻐했다 ^^ 이들의 경기를 한번 직관했다는 이유로.


코트 2의 건너편 예쁜 풍경과 재미있는 복식 경기를 보면서 뒤편에 위치한 작은 코트 5에서 있을 정현 선수의 주니어 3라운드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현 선수의 앞 경기가 3세트로 계속 길어지고 있었고 나는 뜨거운 태양볕 아래 몇 시간을 보내서인지 노곤노곤해졌다.
모자와 선글래스로 얼굴만 중무장을 하고 있었고, 서울보다 온도가 높지 않아서 (30도가 되지 않았는데, 올해 여름 최고 기온이었다고 다음날 뉴스에서 호들갑) 나의 몸의 타닥타닥 타들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햇볕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쪽 손등만 벌겋게 되어있었고, 발등은 타서 아릴 정도. 덥다고 소매없는 시원시원한 옷을 입고 나온 것이 실수. 어깨 부분도 타고 목 아래 부분도 빨갛게 되었다. 내가 그만큼 테니스에 집중했나?!?!? ㅎㅎ
깜짝 놀라서 코트 2를 나왔다.
계속 시간이 안 맞아서 제대로 보지 못 했던 한국 선수 경기를 꼭 하나라도 보고 싶었지만, 앞경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고 정현 선수 경기가 있을 코트 5는 가림막 하나 없이 땡볕에 노출된 작은 코트였다. (맨 위 사진에 찍힌 코트들 중의 하나이다.)
이미 몸이 벌겋게 탔는데, 더 이상 몸을 혹사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한국 선수의 경기는 못 보고 그대로 윔블던을 떠났다. 사실 그때는 그게 올해의 마지막 윔블던이 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뭐 하나라도 더 알아가기 위해 GATE 5에서 passout을 받았다. 이것이 있으면 게이트를 나가더라도 당일 그라운드 패스와 함께 다시 재입장할 수 있다.


벌겋게 익어있는 손목과 그뒤로 갈색이 된 손등. 선크림 한 번 발라줄 생각 못 하고, 무방비로 태운 손 부분, 그리고 아래 발등은 한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할 때마다 약간 아팠다. 


앤디 머리도 없는 남자 결승인데 사람이 그렇게 많으려고? 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결승전이 있는 일요일 오후 2시에 윔블던 파크 앞에 도착하니, "이제 그라운드 패스도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결승전은 결승전이었던 거지. 하지만 나로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약간 더 여행을 연장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문이 하나 닫히니 새로운 문이 하나 열리는 느낌이었달까... "표가 없다"라는 말이 차라리 반가웠다.


코트 입장권 하나 없이 며칠 만에 결정내려 윔블던에 무모하게 방문한 탓에, 그라운드 패스 밖에 얻을 수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나름의 경기들을 즐기고 많이 배웠다. 이것이 마지막 윔블던 방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뭐든 쉽게 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고 생각.

보라색 꽃과 어울려 아름답게 관리되고 있는 테니스 파크 안은 그 내부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분위기만으로도 좋았다. 오랜 기다림에도 누구 하나 찌푸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도 쓰레기가 별로 없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의 미소와 밝은 응대도 좋았다. 이 훌륭한 대회를 계속 훌륭하게 보전하기 위해 누구나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
올해에 애써가며 배웠으니 다음에는 헤매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고 윔블던을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런던에 있으면서 적어놓은 몇몇 tip을 보니...
"일기 예보 강수 확률 꼭 보고 30% 이상인 날에는 방문을 재고. 30%라도 꼭 한 번은 비가 오는데, 그러면 경기가 지연되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게 된다(비가 그친다고 곧장 경기 재개가 되는 것도 아니고 30분 이상의 정리 시간 필요)." ->물론 이 사항은 센터코트 입장권이 있는 사람은 상관 없다. *2019년부터는 추가로 코트1에도 지붕이 생겨, 비와 상관없이 경기를 즐길 수 있다.
"여러 명이 함께 가고, 물과 먹을 것을 미리 사가는 것이 좋다. 나는 나름의 방석을 만들어 가져갔는데, 아예 돗자리가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
- 추가 : 매년 윔블던을 방문하기도 어렵긴 하겠지만, 맘에 드는 윔블던 기념품을 봤다면 그해에 무조건 사야 함. 해마다 엄청나게 오른다. '내년에 살까..?' 라고 생각했다가는 50% 인상된 가격으로 사야할 수도...
등등. 


다음에 여기에 같이 끼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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