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몬드 파크에서의 나홀로 허세


런던 근처에서 가장 큰 공원이라는 리치몬드 파크. 지도를 보면 거의 Heathrow공항만한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런던 거주자 및 여행자 각각에게서 추천을 받았는데, 실제로도 좋은 곳이었다. 물론 번잡한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7월 초. 리치몬드 근처 브렌트퍼드에 숙소를 잡고, 숙소에서 나와 65번 버스를 탔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여기쯤이면 리치몬드 파크랑 가장 가깝겠지?" 하고 어느 정류장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내가 내리고자 하는 지점을 지나쳐 버스가 출발해버렸다. 소심한 나는 세워달라고 말도 못 하고, 그대로 한 정거장을 더 갔다. 이럴 때면 왜그리 유난히도 정류장 간 거리가 긴지 모르겠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씩씩하게 혼자 고풍스런 영국 주택가를 걸었다. 정말 인적이 드물고 적막. 그래도 '이런 동네를 걷다니...한 정거장 더 오기를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나에게 '리치몬드'는
영화 the hours에서 '심약해진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곳' 이라는 정보만 내 뇌 속에 남아있다.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리치몬드를 엄청 떠나고 싶어했었다.

주택가를 걷다보니, 실제로 왠지 the hours 영화와 어울리는 동네 같았다. 인적이 드문 동네를 혼자 걸으면서 내 아이패드에 몇 곡 들어있지 않은 음악 중 하나인 the hours OST를 켰다. 난 보통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원래는 이어폰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데, 다행히 이번 여행에 가지고 온 이어폰은 유용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쳐온 언덕을 걸어올라 마침내 리치몬드 파크 입구 도착.

 


통행자 수보다는 통행하는 차 수가 더 많은 곳.
계속 the hours ost를 들으면서 공원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걱정되어 깊이 들어가지는 못 했다.
저 멀리 보이는 런던의 스카이라인.
내 인생에 이런 날이 있을까...상상하지 못 했다.
남들 대학생 때 다 해보는 유럽 배낭여행을 하지는 못 했지만
남들 애 키우느라 정신 없는 나이에, 훌쩍 떠나서 런던 근처 한가한 공원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
사슴이 뛰어노는 곳에는 유난히 멈춰선 사람이 많았다. 다들 사진 찍느라고.
나중에 공원을 나오다가 "사슴은 예측 불가능한 동물이니 조심하시오"라는 표지판을 보았다.
순한 동물이 아니었구나.

공원 가운데 뜬금없이 벤치가 하나 쓸쓸하게 놓여져 있어서 그곳에 몇 분동안 별 생각없이 앉아있었다.
거기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 안 났다.
하지만 이 공원에서 갑자기 가족들에게 무지 미안했던 것은 생각난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가족들이지만....난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살고 있다가 그냥 도망치듯 와서 이 나이에 엄마 돈을 빌려 여행이나 하고 있었다.
그냥 모든 게 무지 미안해졌다.

이제 가야겠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내가 나름 한국에서 만들어갔던 방석(?)을 그 벤치 위에 놓고 왔다.
윔블던 관람을 위해 만들었던 방석이었는데, 방석 자체는 원래 버려야했던 비닐 등으로 만들어 안 아까웠지만 그 안에 윔블던 기념품점에서 받은 플라스틱백을 넣어놓은 게 생각났다. 윔블던 특유의 녹색과 보라의 조화가 좋아서 일부러 받아온 것이었는데....좀 아쉽네.

리치몬드 파크와 리치몬드 역은 가까이 위치한 건 아니다.
그래도 구글 지도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리치몬드역까지 무작정 걷기로 했다.

리치몬드 파크 주변은,
한국에선 한 번 지나가면 우와~ 하고 뒤돌아볼만한, 한국에선 비맞을까 눈맞을까 두려워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있을만한 고급 자동차들이 그냥 집앞에 아무렇지 않게 세워져 있는 고급주택가였다. 건물들도 다 예쁘고 한적해서 소위 '외국 생활'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살면 좋겠다.'
하지만 이미 서울에 익숙해진 나는 일주일만에 심심해지겠지?


나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이
직장에선 중견 사원으로, 가정에선 대부분 두 아이의 엄마로,
치열하게 살고 있는 이 시점에
모든 것을 놓고 한가하게 보냈던 하루.
이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이것이 언제 다시 가능할까.


이번 여행에서...
여행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은 여행지의 풍경이나 여행에서 만나는 특이한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돈 쓰는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즉, '돈 버는 고달픔'에서 벗어난다는 것.
여행지 - 그곳이 좋은 게 아니라 "그곳에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
여행지의 아름다움은 별 상관이 없다.
결국은 쇼핑할 때 느끼는 즐거움과 더 상관이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세계 7대 절경' 앞 매표소에 표 팔고 있는 아가씨는 서울에서 지하철 한 번 타보는 게 소원일 수 있다.
그저 나의 매일매일의 의무감에서 벗어나는 곳이 바로 최고의 관광지.
굽실거리지 않을 자유. 책임감에 시달리지 않을 자유.
그냥 그것을 찾아서 멀리 떠나는 것.

여행을 떠나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평등하다. 내가 그 사람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진심에 없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환심을 사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돈 쓰는 즐거움' 이게 여행의 본질이었다.

남의 돈을 빌려 여행을 떠난 나는 내내 불편했다.
그런데도 떳떳하게 내가 번 돈으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1년에 360일을 희생할 용기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깨달았다.
이렇게 자유롭게 도피하기 위해서도 돈이 얼마나 필요했던지...

대체 어떻게 돈 벌고 살아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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