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뒤엔 다 아름다워




지난 8월에 서랍을 열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쪽지 하나 때문에
갑자기 향수병(?) 생김.






15년 전 톈진 살면서 라디오 주파수 맞춰가며 방송국 이름 기록해놨던 종이인데...
이것 하나 때문에 뜬금 톈진에 대한 흥미가 다시 살아남.

그 뒤로 두어 달 간 띄엄띄엄 지도를 살펴보거나
예전 살았던 흔적을 찾아보거나
내가 다시 이 도시를 방문한다면 어느 호텔에 갈까를 상상해오곤 했다.


호텔 위치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공부를 하다보니
톈진은 상당히 특이한 도시였다.

19세기 중반부터 1947년까지 무려 9개국이 들락거리며 조계 concession 로 나눠먹은 도시였던 것.
영국(미국), 프랑스, 일본,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벨기에, 러시아 조계지 각각의 구역이 있고, 흔치 않게 그 당시의 행정부 건물, 각국 은행 건물 들을 잘 보존해 놓은 곳이 톈진이다.

물론 당시 8개월 동안 살면서 도시를 돌아다녔을 때도 그런 서양식 건물들을 많이 보았던 것이 어슴푸레 기억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은 나라가 땅을 빌려 통치한 줄은 몰랐다. 지금도 중국의 많은 도시가 겪고 있는 문제지만, 사실 톈진의 공기가 너무 안좋아 도시를 맘껏 탐험하며 재밌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고 지냈던 것 같다.

일명 '서구 열강' 침략의 역사이지만, 이제는 오히려 각각의 구역들을 관광 자원으로 멋지게 개발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톈진 도시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니, 사진만으로는 너무 아름다웠고 꼭 다시 찾아가고 싶었다.

아, 왜 그때 살 때 당시에는 그걸 몰랐을까.
주중에는 일하느라 시간이 없긴 했는데, 주말은 그래도 자유였는데.
나 나름 역사에 관심 많던 사람이었는데. 좋은 기회를 놓쳤네.


변두리 아파트 단지에 살던 내가 그래도 '시내'에 나간다고 나갈 때 가던 곳은 지금 새삼 공부해보니 프랑스, 영국의 조계지였던 곳들.
각 조계지 거리마다 하나 하나 걸으면서 사진을 남겨놓았다면 좋았을 뻔 했다. 지금처럼 '폰카'가 있었다면 사진이 아마 많이 남았겠지. 당시에는 디지털 카메라도 흔치 않던 시절.


내가 살던 때는 영국 조계지 행정 청사(administrative building)도 그대로 있었을 텐데, 2010년에 그 건물을 해체 이전했고, 지금 그 자리에는 톈진 최고의 호텔이 들어서 있다. 워낙 시내 중심부라 아마 오다가다 여러번 이 건물을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무슨 건물인지도 몰랐고, 아무도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한국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 있던 것은 기분 나쁜데, 다른 나라의 행정 시설은 그냥 관광의 기분으로 호기심이 생기다니...뭔가 역지사지가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톈진시는 이 행정부 건물을 완전 해체하지는 않고, 강변으로 위치를 옮겨다 놓았다. 그냥 역사의 한 흔적으로서 남기는 듯. 시내 중심부에 아예 五大道라고 해서 서양식 건물이 많은 5개 거리를 관광지로 묶어 개발해놓았다. 내가 살 때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아마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엄청난 도시 미관 변화가 있었던 듯 한데, 초대형-초고층 건물을 빽빽히 세우는 중국 스타일 대공사가 시작되기 전 옛 모습을 간직한 톈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쇼핑몰만 왔다갔다 하다가 8개월이 끝난 것 같다. 쇼핑에 몰두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가진 정보로써는 주말에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법 밖에 몰랐고, 내가 살던 곳은 지금 보니 톈진 도심 남서쪽에 치우쳐 있었다. 지금 도시 공부를 하다 보니 톈진의 중심은 내가 살던 곳보다 좀 더 북동쪽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조계지 같은 곳은, 내가 살던 곳에서 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찾아가야 하는 곳인데 나는 8개월 동안 그 강 건너편은 기차를 타기 위해 딱 한 번 가봤을 뿐이었다. 그쪽 지역은 좀 무섭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강변이 너무 아름답게 개발이 되었고, 이탈리아 조계지는 이탈리아 방식으로 거리를 꾸며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뭔가 나는 그 도시의 옛 모습의 산 증인이 될 수도 있었는데, 첫 외국 생활이었고, 잘 몰랐고 너무 소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 아쉽다. 당시에는 그 '기회'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








또한, 톈진역에서부터 전철로 1시간 25분 정도 걸리는 빈하이新區 지역에 매우 미래지향적인 문화 시설을 지어놓았더라. 도서관의 내부 디자인이 특히 유명한데, 안에 들어가보면 실제 책이 꽂혀 있는 게 아니라 대부분 "책 사진"이라고 ㅎㅎㅎㅎ 중국답다. 시간을 들여 힘들게 찾아 간 외국인 방문객들의 평가가 하나같이 안 좋다. 그저 "instagrammable" 인 곳인 듯.


그저 사진 한 장 남기기 위해 이곳에 가고 싶은 건 아니고(후기를 보니 그것 밖에 할 일이 없다고ㅋㅋ), 다른 각도의 사진들을 보면 공간감이 무척 좋아보여 여기도 한 번 가보고 싶다. 15년 전에 살면서 늘 이름으로만 듣던 塘沽, 泰达지역에 있다.





지저분하고, 공기 매캐하고, 한정된 사람들과만 교류하고...
기억 속에 그냥 회색빛으로 남아 있던 톈진이 다시금 이렇게 끌리는 것을 보면
그저 지나간 뒤엔 다 아름다운 건지.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내가 살 당시의 중국은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한, 그런 발전 단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여유를 찾아서 도시를 아름답게 개발하고 관광객을 모을 생각을 시작한 것이지, 내가 살 때는 그저 삭막했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