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21'보다는 그동안 준우승만 4번 한 '호주오픈' 한 번 더 우승해보자는 게 훨씬 간절했던 결승전.
간절하면서도 사실 이길 것 같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마음 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져도 된다 져도 된다 하면서 보았기에 1,2세트 패배끝에 3세트를 가져갔을 때 '이제 이것만으로도 됐다'라고 안도해서 마음이 더 편해졌던 듯 하다.
메이저 대회 결승 문턱도 못가보는 선수의 팬들이 들으면 호강에 겨운 소리한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최근 10년간 4번의 결승전에서 너무 불운해서 마음 아팠던 나달의 호주오픈, 그래도 올해는 어떤 보상은 있지 않을까 했다.
잘 되리라 믿으면서도, 올해와 비슷하게 부상에서 복귀한 뒤 얼마 안 된 시점에 있었던 2019년 결승전이 재현될까봐 걱정이 됐다. 4강전까지 너무 파죽지세로 올라가서 결승도 해볼 만하다는 소리가 많았던 2019년이었지만, 조코비치에게 별 힘도 못 써보고 3세트만에 깔끔하게 패배했다. 그뒤 내가 기억하는 인터뷰 내용 중엔 '부상 복귀 뒤 다른 것은 몰라도 조코비치 수준의 수비에는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라는 것이 있었다. 올해 2022 호주오픈도 나달의 결승전 상대자가 그 조코비치를 3세트 압살하는 수준의 "문어발🐙" 질식수비 다닐 메드베데프라서 같은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35살에 힘들게 결승에 갔는데 6-2 6-1 6-3 초라하게 퇴장하면 어쩌지?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미친듯이 공을 받아내고 보내는 2021 US오픈 우승자 다닐 메드베데프를 2022 호주오픈 우승 후보로 꼽았고, 나도 그의 수비에 지쳐 10살 많은 나달이 나가떨어질까봐 걱정은 좀 됐다. 메드베데프는 타이핑하기에 이름이 길어서 앞으로 '다닐'의 '예쁜' 러시아식 애칭 "Даня다냐"로 쓰겠다. 러시아 사람들만 그들의 '몌드볘졔프'를 다냐로 부를 뿐 Саша싸샤처럼 보편화된 애칭은 아니다(너무 다냐스럽지 않게 보여서?! 😉). 쳐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타이핑이 유난히 귀찮은 이름이라 한국에선 보통 메뎁, 영어권에서는 Meddy라고 쓴다.
작년 US오픈 결승에서 조코비치도 공략에 실패한 다냐의 수비벽을 나달이 이번에 뚫을 가능성이 안 보이는 와중에도 다른 방향의 생각도 했다. 나달이 호주오픈에 준우승 징크스가 있다면 작년에 준우승한 다냐라고 없을 이유도 없다는 것. 내 생각에 다냐는 US오픈에서 좀 더 뛰어난 것 같았다. 2019년 라파;다냐 US오픈 결승을 보면 2세트까지 맥없이 나달에 밀리던 다냐가 3,4세트 거센 반격에 나섰었고 2021년에는 빈틈없는 모습으로 우승까지 차지했는데, 2021년 호주 오픈 결승에서는 1세트에서 경기가 안 풀리니까 침착하게 추격을 하는 게 아니라 공을 마구 치면서 스스로 붕괴하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래서 다냐가 생각보다 호주 오픈과 잘 안 맞는 게 아닐까 하는 '분석' 아닌..... '바람'을 가졌다.☺ 무적모드 US오픈과는 달리 호주오픈에선 5세트까지도 종종 끌려가고.
나의 또다른 "믿는 구석"이 뭐냐면 호주오픈 때의 나의 건강과 나달 건강이 비슷하다는 이상한 착각인데, 이번 결승전 당일날 내가 몸이 아픈 곳이 없어서 나달이 이길 것 같다는 묘한 확신을 갖게 됐다.
이런 착각을 하게 된 것은 2014년 나달의 결승전부터이다. 결승 상대는 한손 백핸드 바브린카로, 당시 나달에게 12연패 중이었다. 한손 백핸드를 치는 선수는 상대적으로 나달에게 매우 약하다. 게다가 나달이 페더러(역시 한손 백핸드)를 만나서도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준결승을 쉽게 끝내고 결승에 올라가는 바람에 당시 거의 모두가 나달의 우승을 점쳤다.
그 결승전 시작 전, 낮에 동창 결혼식이 있었는데, 같이 참석했던 친구 차를 타고 집앞까지 같이 왔다. 친구가 나를 내려주고 떠나는데 혼자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뒤에 있던 볼라드를 보지 못하고 걸려서 그대로 인도에 발라당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내가 인도에 그렇게 누워본 것은... 술취하지 않고서🤪 제정신으로는 유일한 날인 듯. 그래서 근육이 놀라서 불편감이 있었는데, 나달도 그날 결승 직전 연습 시간에 당한 갑작스런 허리 부상으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헉, 혼자서 후회했다. 친구의 차는 이미 떠나버렸는데 뭘 인사하겠다고 서 있었을까. 나도 예상치 못한 부상을 당했는데, 나달도 당했구나.....
그러다가 2017년, 나달이 또 호주오픈 결승에 가게 됐는데 그때는 준결승을 보고 나서 책상 밑에 뭔가가 떨어져서 주우러 밑에 들어갔다 나오다가 책상 밑면 쇠고리에 머리를 쾅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서 두피에 작은 딱지가 생길 정도의 부상(?). 그 해에도 나달이 결승 5세트 가서 아쉽게 패배ㅜ.ㅜ
2019년 인디언웰스 때도 내 한쪽 무릎이 이상하게 욱신거렸는데 나달도 무릎 통증을 이유로 (그러나 나와는 반대쪽 무릎이었던 듯 😝) 4강전에서 기권했다. 그래서 그 뒤로 묘한 혼자만의 착각/미신이 생기게 되었다. 내가 다치지 않아야 나달도 잘 풀린다.... 하는 거??
그런데 어제 결승전날은....아침에 눈을 떴는데 몇달간 나를 괴롭히던 통증이 없었다.
그래서 아, 오늘 잘 되겠구나 하는 감이 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익숙한 그 통증이 있었다면 '아, 오늘도 안 되겠구나' 했을 거다. 그 혼자만의 생각이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미신은 이렇게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ㅎㅎㅎ
하지만 결승전 2세트까지는 나달이 끌려가는 양상.
라파 - 다냐의 결승전 1세트는 2-6로 차이가 많이 났지만 2세트는 6-7로 근소한 차이로 졌다. 그래서 그때 이미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2-6 1-6 이런 식으로 격차가 크지 않고 타이브레이크까지 갔으니 처절히 싸우다가 진 것이기 때문에.
2세트도 졌지만 우울하진 않고 그냥 이건 어쩔 수 없구나..하는 생각만 들었다. 단지 첫 서브가 너무 안들어 간 게 답답했는데, 간발의 차로 벗어난 몇개만 들어갔어도 서브 에이스로 경기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을 같아서 너무 아쉬웠다. 어찌나 첫 서브가 안 들어가던지... ㅠ.ㅠ 그러면서도 오늘 신체 상태가 좋은데 5세트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다.
3세트 중반 해설자가 "메드베데프가 관뚜껑 덮기 직전이네요" 했을 정도로 스코어가 밀렸을 당시, 나달은 이런 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Pues ya está" 그래, 이 정도면 됐다 - 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모두가 포기했을 당시, 나달만이 포기하지 않았다.
롤러 코스터를 타던 끝에 5세트까지 왔고 25세 다냐보다 35세 라파의 체력/집중력이 훨씬 돋보였다. 마지막에도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 우승했다. 🏆
나랑 진짜 건강 상태 일치하나봐! ㅋㅋㅋ
내 착각은 나의 자유 :)
결승 하기 전에도 이기면 많이 울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나는 5시간 반 동안 덤덤하게 봤는데도 챔피언십 포인트가 끝나자마자 진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나에게도 그런 눈물이 있을 줄은....
운좋게 반대편 드로가 망해서 쉬운 상대가 결승에 올라오길 바라기도 했지만, 꼭 현시점 1인자 메드베데프가 올라와야 한다는 어떤 팬의 말도 결국 맞는 말이었다. 현존 하드코트 최강자를 실력으로 끝끝내 누르고 우승했으니 뒷말 나올 일이 없다.
경기 끝나고 기억의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꺼내보지 않는 경기들도 있는데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경기가 또 생겨서 기쁘다. 2019년 US오픈 결승, 역시 다냐와의 경기 5세트는 진짜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결승전 패배 후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야유하는 관중에 대한 실망과 함께 어린 소년의 꿈이 이젠 죽어버렸다는 인터뷰를 한 다냐 메드베데프. 물론 그가 서브할 때 방해를 일삼은 관중들도 나빴지만 다냐도 경기가 안 풀릴 때 본인도 제어를 못하는 광기 + 관중이랑 꼭 맞장을 떠보려는 똘끼가 있어서 안티를 수집하는 중인 듯. 경기가 끝나면 정상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난 다냐 좋아하는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다냐가 2018년에 ATP tour 첫 우승하던 경기도 지켜봤었고, 그가 우승 스피치에서 그 자리에 오지 못한 아내에 대해 말한 것도 기억난다. 비자를 못받았다던가... 특히 2019년 US open Wawrinka와의 경기에서 신선한 인상을 받아서 그 후로는 늘 다냐의 경기는 범상치않다고 생각하고 즐겨보는 편이었다. 물론 나달과 붙으면 나달을 응원하지만. 😁
조코비치가 코트에서 고함 지르고 난리나는 자신과 비슷한 모습을 다냐에게서 발견해서인지 자꾸 자기와 다냐를 비슷한 라인으로 묶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조코비치가 본인과 비슷하게 코트에서 라켓을 후려치는 즈베레프까지 포함해서 "이들은 코트 안팎에서 "완벽한 척"은 하지 않는 authentic 선수들"이라고 인터뷰. 아니 그런 행패가 착한 '척' 안 하는 솔직함에서 나온🤷♀️ 행위라면, 다른 인성 좋은 선수들은 '가식'으로 코트에서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는 말?) 다냐 본인도 범생이 스타일 나달보다는 조코비치를 더 가깝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관중에게 응원받고 싶은 마음이 크다면 조코비치식 감정 표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게 나아보인다. 그래도 다냐는 인터뷰 등을 너무 잘 하고 솔직해서, 다른 종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선수이다. 조코비치와 즈베레프는 인터뷰만 보면 서글서글 좋은 사람같으면서도 최근 거짓말을 한 사례가 걸려서 주위를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느글느글한 캐릭터들인데 다냐는 거짓말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두 명과는 다른 노선을 택하면 좋겠다.
'왜 나를 응원하지 않지?' 같은 생각 대신에 심판에게 고함치고 행패 부리는 버릇을 먼저 고쳐야 될 듯. 사람들에게 악당 캐릭터로 몰리기 딱 좋다. 국적에 관련된 악담을 퍼부은 최악의 관객들의 잘못도🤦♀️ 크지만, 다냐도 괴성과 손짓으로 관중 눈에 띄게 되는 자신의 경기장 태도를 고쳐나가지 않으면 관중과의 관계는 나아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Pro tip: Making dismissive hand gestures to a packed stadium isn’t the best way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 - LA times, Charles McNulty) -> 3세트 막판에 다냐가 브레이크 포인트에 몰리는 과정에서 나달팬들의 환호로만 끝났을 것을 거기서 다냐가 삐딱한 표정으로 관중을 비꼬는 듯한 태도로 박수를 치자마자 야유가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실수에 환호하는 관중을 충분히 기분나쁘게 생각할 수 있지만 + 꼭 도발을 하는 것도 다냐임. 관중의 사랑은 본인이 얻는 수 밖에 없는데 늘 반대로 행동해서 아쉽다.
사랑받는 선수들이 어떻게 처신해서 사랑받고 있는지를 참고 좀 하고... '나는 착한 척은 하지 않고 살 거야'라고 생각하기보다 그게 '척'이 아니고 진짜 사람됨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경기장의 반을 채울 내 팬들은 다년간의 나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15년 이상을 뛰어서 다수 관중의 사랑을 획득한 노장 선수에 비해, 관중이 자신들에게 응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징징대는 5-6년차 '넥젠'의(여기서는 다냐를 포함하는 것이 아님) 몇몇 인터뷰 내용을 보고 질린 이번 호주오픈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온세상이 자기를 응원한다고 착각하는 거대한 자아상을 가진 선수(ni...k...🤡)도 있어 놀랐고.
나달조차도, 롤랑 가로스에서 이미 4번이나 우승한 후였던 2009년에 16강전에서 소덜링에 패해서 탈락할 때 관중들이 디펜딩 챔피언인 자신이 아닌 소덜링을 크게 응원해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관중들은 처음에는 기대하지 않았다가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소덜링의 한 포인트 한 포인트에 환호가 점점 커지고 나달이 실수할 때마다 열광하며 엄청 큰 소리를 냈다. 특히 마지막 타이브레이크(12:57~)는 화질 때문에 공의 움직임이 잘 안 보이지만 관중의 엄청난 함성이 들리면 그게 소덜링의 위너/나달의 에러라고 보면 될 정도. 올해 호주오픈에서 나달이 받았던 응원을 소덜링이 받았다고 보면 된다. 당시 롤랑에서 4번이나 우승한 선수였던 나달이 상처를 입었을 만하다. 자신의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을 마주할 때의 그 기분이란....
메드베데프는 인터뷰에서 '관중들은 내가 (+ 넥젠이 )이기기를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앞으로는 자신을 위해서만 경기를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하지만 2009년 16강전에서 22살 나달에게도 그랬다. 관중들이 당시 페더러의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4년째 저지 중이었던 나달의 승리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저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본인보다 거대한 산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겪어가며 13년이나 더 꾸준한 경기력과 본인의 인성, 평상시 언동 등 자기 관리를 해온 결과 오늘에 이르러 관중의 사랑을 얻은 것인데 5-6년차가 프로 생활 20년의 두터운 팬층과 비슷한 응원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나도 오래전 나달이 준우승한 경기를 본 뒤에 팬이 됐듯이 다냐의 준우승 과정을 보고 이번에 분명히 팬이 더 많이 생겼을 테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으면 좋겠다.
실력보다 인성으로 욕 많이 먹고 있는 소위 '넥젠'들을 나는 귀엽게 보려고 하는 편이었는데, 최근에 보니 다들 너무 자의식 과잉이고 성취에 비해 비대한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놀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싶기도 하다. 얘들도 35살 되면 '요즘 것들은 투정을 많이 하네, 나때는 말이야....' 그러고 있겠지.😆
아무튼, 2012년 6시간 결승전의 쓰라린 패배 이후
10년 만에 이번 호주 오픈은 해피 엔딩.
해피 엔딩이지만 펑펑 울 수 있어서 더 행복했던 2022년 1월 30일이었다.
지면 울지 않지만, 우승하면 눈물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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