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드라마 입문 추천

 


모임도 없던 코로나 시대의 추운 연말 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중국 드라마를 보게 된 지 3년이 되어가는 것을 기념하며, 중드 시청 시작하기에 좋은 작품을 추천한다. 고유의 의미가 있는 작품을 골랐다.

참고로, 👧🧒일곱살 시절에 나에게 잘 해준 그 아이...를 잊지 못해 평생 연애도 안 하고 그리워하며 살다가 2,30대가 되어 절절히 재회하는... 중국 드라마에 숱하게 많은 이런 류 이야기에 공감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 드라마는 추천작에 없음. 



1. 平凡的荣耀 평범적영요 Ordinary glory (2020년 9월 중국 방영) 총41화


"未到终局,焉知生死"

40회-70회 분량으로 만들어지는 중국 드라마의 첫번째 진입 장벽→ 잘 만들어진 미드/한드처럼 처음 1화부터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초반 5-6화 분량이 매우 재미없다. 남•여 주인공을 어떻게든 만나게 하기 위한 초반 억지 설정까지 넘쳐나서 탈주 계획 세우게 됨.🏃‍♂️ 심지어 중드는 흥미를 유발하는 편집이 아니라 일정 시간이 되면 회차를 뚝 끊는✂️방식의 편집이 많아서, 애 태우며 다음 회로 넘어가게 만드는 요인도 없다. 여태 '20회까지만 참아보세요. 그 다음부턴 술술 넘어갑니다'가 최고 기록인 줄 알았는데 무려 "34"회까지는 참고 한 번 보라는 작품마저 등장했다(꽤 명작으로 자주 거론되는 작품임). 대부분의 중국 드라마가 초반이 재미없는데, '중후반에 괜찮아진대'라는 입소문만 믿고 참아가며 봐야 한다.

또한 현대극에선 인기있는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하기에 '핫한' 20대 중초반 배우를 출연시키는데, 주인공의 매력을 마구 주입시키려다 보니 나이에 비해 성취가 과도한 인물들이 나온다(예: 20대 중반 배우 ➡️ 로펌 대표). 극중 역할이 운동 선수/연예인처럼 어린 나이에 성공하는 직종이 아닌데 20대에 이미 업계 평정하고 주위 사람들은 벌벌 기는 설정 흔함. 이게 뭔가 싶으니 또 탈주하고 싶어지게 되는데... 平凡的荣耀는 익숙한 [미생] 리메이크이기 때문에 1회부터 현실적으로 잘 짜여진 대본과 연출을 볼 수 있다.

다른 중국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서 출연자 신상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배우같지가 않고 그저 진짜 회사원처럼 보이기 때문에 굉장히 실감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그랬음😜) 그래서 입문작으로 강력 추천. 

다른 드라마를 많이 본 후에 이 드라마를 보게 되면 '어 저 부장님 거기 나왔던 사람이잖아?' 하면서 역할이 짐작이 되고 어떤 연기를 할지 선입견이 생기기 때문에 몰입도가 떨어진다. 이 '몰입'이 어떻게 다른지 한국 배우를 예로 들면 이해할 수 있다. 평소 이정재의 생활상을 아는 한국인들 중에는 그의 '오징어게임' 연기를 약간은 어색하게 받아들인 사람도 많고 '연기 변신했네' 정도로 연기력 자체는 큰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극중 이정재가 아무리 경마장에서 폭력배에게 얻어터져도 한국인들은 그가 말끔하게 수십억대 집으로 귀가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극중 성기훈은 '선물'이라는 주식 용어를 이해 못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왠지 투자의 귀재일 것만 같은' 📈 이정재의 잔상이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처음 봤을 미국인들은 그저 처절한 상황에 던져진 찌질한 '성기훈' 그 자체로만 봤을 것이다. (실제로 이정재는 미국 레드카펫에서 "이렇게 스타로 떠오른 기분이 어때?" 이런 류의 질문을 받았다.) 이정재는 그해 미국에서 TV 배우로서 받을 수 있는 최정점의 연기상(SAG, Emmy)을 모두 받았다. 정작 그의 한국어 대사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국에선 오징어게임으로 연기 상을 거의 못 받았는데 말이다. 

배우의 원래 모습을 모르는 것은 극 몰입에 영향을 꽤 미친다고 생각한다.



미생은 일본•중국에서 모두 리메이크 됐는데, 한중일 3명 중에서 외모로는 중국 배우 白敬亭이 '장그래' 역할 자체에는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 白敬亭에 비해서 임시완은 '기가 엄청 쎄' 보여 덜 안쓰럽다는 이야기가 많다(임시완이 연기를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가 본래 가진 분위기를 말하는 것). 白敬亭도 연기를 매우 잘 해서 내가 수여하는 2021년 남우주연상감이었음. 멋적을 때 머리 긁적긁적하는 동작이 매우 안 어울리는 거 빼고는, 표정은 물론이고 감정 따라 바뀌는 걸음걸이와 애처로운 뒷모습까지 정교하게 잘 연기했다.

특유의 숨막힐 것 같은 회사 분위기도 제대로 연출되어 있다. 감독이 30대 초반에 연출한 작품인데 어디 가서 많이 치이다 온 건지, 치열하면서도 갑갑한 회사 내부를 실감나게 살려냈다. 원작을 잘 받아들이면서도 중국 상황도 잘 조화시킨 모범적 리메이크 작품이다.

회사에서도 고생하는데 구태여 미생까지 왜 보며 또 괴로워야 함?? 이랬던 사람들은 (내가 그랬음😜) 언어가 다르고 약간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미생] 스토리를 중국인을 통해 대리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기본적으로 한국 영화/드라마보다 외국 것을 더 많이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번역의 오류가 생기더라도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해서 생기는 거리감을 더 편하게 여긴다. 




2. 去有風的地方 거유풍적지방 Meet yourself (2023년 1월 중국 방영) 총 40화


"乌云会有时 总会有风来"

여태까지 본 중드 중에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무난하고 따스한 스토리. 하지만 일부 모티브나 소소한 등장 인물의 외양마저 한국 드라마 "갯마을차차차" 표절설이 있다는 게 약점이다. 중국 현대극 대부분은 상하이, 베이징 등이 배경이지만 이 드라마는 윈난성 大理가 배경이라서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보는 재미가 있다. 이 도시의 실제 관광 수입 증대에 드라마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요"라는 원제와 Meet yourself라는 영어 제목에서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 유유자적 사는 단순한 얘기만은 아니고 중국 사회 문제를 조금씩 엿볼 수 있다. 

배우들은 서로 잘 섞여 들어가는 연기를 보여주며 남녀 주연 훤칠하고 나긋나긋 예쁘다. 특히 중/노년 여배우들의 연기가 드라마 전개를 착실히 받쳐주고 있는데, 1938년생(!) 배우 吴彦姝의 귀여운 할머니 연기를 우리 엄마가 참 좋아하셨다. 중국 거대 전자 기업 화웨이 창업자의 늦둥이 딸 姚安娜가 하버드를 졸업하고 연예계에 뛰어들어, 이 드라마에서 구멍가게 점원으로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풍경이 아름답고, 등장인물 설정 무난하고, 민망한 억지 에피소드가 드문... "밥 먹을 때 켜놓고 보는" 밥친구로 좋은 드라마.

그저 악역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악역으로 나와서 쓸데없이 눈을 부라리며 연기하는 악역도 없고, 중국 드라마의 치명적 단점인 '궁금하지도 않고 별 매력도 없는 조연 배우들까지 커플로 꼼꼼히 엮어 주느라' 그 곁가지가 전체 분량을 왕창 잡아먹는 경우가 이 드라마에선 거의 없음. 깔끔함.




3. 아적전반생 我的前半生 the First half of my life (2017년 7월 중국 방영) 총 42화


"可我偏偏就是这么‘’

현대극이지만 2017년 방영작으로 이제 살짝 촌스럽고, 이 드라마 역시 앞의 4-5화 이상 견뎌내야 속도 붙음.

중국 드라마에서 가장 양산하고 있는 게 한국식 분류로 말하면 이런 '로맨스'극인데, 그중에서는 가장 추천함 (특히 3-40대 이상에게). 🧑‍🦱👩‍🦱 업계에서 알아주는 유능한 주인공 커플이 '겁나게' 일을 잘 하면서 주위 사람을 물심양면 돕는 중국식 '도시정감극都市情感剧'에 한국 아침 드라마 느낌 한 스푼. 홍콩 작가 亦舒의 1982년 출판 소설 원작을 2010년대 중국 상황에 맞게 각색했다. (사족으로, 중국어에선 각색脚色이라고 하지 않고 개편改编이라고 쓰고, 같은 음으로 읽히는 각색角色/juésè/는 배역, 역할을 의미한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야" 라고는 쉽게 말을 못하겠는데, 굳이 '중국' 드라마를 보겠다면 이걸 보라고는 권할 수 있는 작품. 2016년에 촬영했기에 내가 이 드라마를 처음 보게 된 2021년과 중국 제작 시기가 5년 정도 차이가 나긴 했지만, 당시 한국과 꽤 다른 중국 사회 문화를 볼 수 있었다. 중국은 군 입대가 없고 그때까지도 20대에 결혼을 서두르던 문화여서... 서른 살에 이미 결혼 생활은 지루해지고, "사회 생활 10년을 채운 30대 초반이면 꽤 많은 걸 이루어 놓아야 하는" 중국 도시 사람들의 압박감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많다. 한국에서 꽤 인기를 얻은 중국 드라마에 속하는 三十而已 (겨우 서른) 도 이 측면에서는 비슷한 결을 보여준다.

요즘의 한국에선 20대 후반까지도 직장 제대로 자리잡기 힘들고, 30대 초반에 결혼해도 "빠른 편"에 속해 겨우 사회초년생 티를 벗게 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드라마 제목인 我的前半生은 내 인생의 전반부-라는 뜻으로 30대 초에 이미 인생의 토대를 다 닦고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2010년대 중국식 삶을 보여준다. 2020년대 들어서는 중국도 한국과 비슷하게 결혼을 미루고 출산률이 곤두박질 치고 있다고 한다.

이 드라마에서 회사라는 공간에 가족/외부인들이 너무 쉽게 들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상황이 말이 되나?? 했었다. 하지만 다른 드라마들을 봐도 외부인들이 직업의 공간에 너무 쉽게 들어오는 모습을(특히 병원) 많이 보게 되니 이젠 "이게 중국의 특징인가보다" 한다. 중국 드라마에 나오는 병원을 보면 의사는 쉴 곳이 없나 싶게 지인, 환자 & 환자 보호자들이 수시로 공간에 침입한다. 또한 형사가 자식을 경찰서 내부로 데려와 재우거나 공부를 하게 하는 설정도 두어 번 봄. 🙇




'어른'들의 인생과 사랑 이야기. 뻔하지만 또 보게 되는 전개. 인간 관계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게 함. 

미사여구가 아니고 정말 흔한 대사인데, 사랑에 빠진 남녀가 왜 천지분간 못하고 뛰어다니는지 이해하게 만들어준 대사가 하나 나온다. 수많은 드라마에 굉장히 많이 나오는 설정이 "아닌 척 하다가"도, "내 감정을 부정하다가"도 상대방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몸이 먼저 자동으로 뛰어드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대사에 나왔다. 남들이 보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대사인데, 나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줬다.





4. 鬓边不是海棠红 빈변불시해당홍 Winter Begonia (2020년 3월 중국 방영) 총 49화


‘’你知道什么是知音吗?‘’

知音 -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의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해석.

경극 등장 - '중국'이기에 만들 수 있는 내용. 앞의 작품들이 무난하고 국적과 상관없는 인간사를 다뤘다면, 여기부터는 좀 더 중국스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하는 작품. 경극에 대한 지식이나 1930년대 역사적 배경 지식이 있으면 더 좋을 듯. 배경 지식이 많을수록 이해도가 높아짐. 드라마 상황과 궤를 같이 하는 경극 공연이 종종 나오는 듯한데, 한국인으로서는 가사와 맥락 이해 불가. 경극 가사에는 자막이 제대로 안 나와서 아쉬우나 번역자도 애로 사항 많았을 것이다. 한국어에서도 "제비 몰러 나간다~" 이런 것을 외국어로 느낌 그대로 살려 번역하기는 어려우니까.

소설 원작은 훨씬 더 진한 男-男 사랑 이야기라고 하는데, 중국은 드라마 검열과 규제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드라마를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知己" "知音‘"으로 극화한 두 사람의 관계가 나에게는 훨씬 좋았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엇이든 그 어딘가에 걸쳐있는 사람 사이의 애틋한 감정은 단 한 가지가 아니므로.



배우의 힘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는 드라마인데, 주연 배우 2명이 타고난 자질에 덧붙인 노력으로 극을 어떻게 끌고 가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배우가 가진 화면 장악력이란 게 무엇인지 제대로 나온다. 

한 명은 중화권 최고 미남 배우의 매력과 눈빛, 목소리로 화면을 채우고 다른 한 명은 표정 뿐만 아니라 이모저모 신체를 잘 쓴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싸움을 시작하면 얼굴과 몸이 화면에서 분리되는데(대역 사용) 이 드라마에선 경극 배우의 고운 손짓을 소화해 낸 주연 배우 尹正이 무력을 사용할 때도 대부분 얼굴까지 같이 잡히면서 직접 액션을 소화하기에, 그는 몸을 꽤 잘 쓰는 배우로 보인다. (얼굴 근육을 못 써서 사랑에 빠져도 목석🌵🪨이고, 몸을 못 써서 누워 있는 모습마저 어색한🤖 배우도 허다한 현실)

보면서 '아휴 이게 뭐여' 라는 이해 안 가는 설정(ㅊㅅㅇ ㅂㅁ)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점수를 깎았는데, 누군가의 해석을 들어보니 반전이 있는 나름 필요한 설정이기도 했다. 꼭 이래야만 했나.. 라는 '그' 설정이 나오는 27회지만, 동시에 절박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인간의 본심/利害 계산...이런 것들 때문에 내 마음이 쿵 내려앉았던 회차이기도 해서, 다시 한 번 깨닫는 바가 있어 탈주🏃‍♂️ 욕구를 참고 계속 봤다. 

극 중후반... 성우였든 배우였든 코를 빨래집게로 찝은 듯한 일본인 장교 역할의 대사 처리 (위협적인 존재로 보여야 긴장감이 사는데, 입만 열면 사람이 우스워짐. 중국인이 생각하는 일본인이란 대체 뭔지 일본인 역할은 모두 코먹은 소리 더빙인데, 그중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이 가장 맹한 발음을 함) + 중국 침략을 위해 '친절하게🙄' 산동 사투리 중국어를 배워왔다는 일본 장교 설정까지는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겠는데 일본군끼리 고작 "요시~" 만 쓰다가 그 코먹은 중국어로 일본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연스럽지 못한 장면을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42 😬


더불어 후반부에는 주인공 트라우마를 한 방에 고친다며 '이게 무슨 관련이 있나?' 싶은 상황극을 만드는 내용🤷까지 더해져 드라마 완성도를 해친다고 생각 될 정도의 장면이 나온다. 정교한 세트장/화려한 의상 뿐만 아니라 항일 전투 장면 등 예산 안 아끼고 열심히 만든 작품이지만 그래도 덜컹 콜록거리는 부분은 있다. 

인생을 바꿔버린,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한번에 용서하길 종용하거나 트라우마를 짠!하고 xx요법으로 건드리면 나아지겠지? 하는 게 중국 드라마 고질병인데 여기에도 등장한다. "타임슬립" 드라마의 영향으로 환생을 믿고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자, 타임슬립 소재 제작을 제한했다는 중국에서 이런 근거도 없는 "트라우마 퇴치" 충격 요법 장면은 왜 제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드라마의 이런 설정 믿고 맘대로 충격 요법 실시하는 사람 나올까 걱정은 안 하는지?

몇몇 단점이 보여서 정작 처음 시청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지나고 난 뒤에야 더 생각나는 아련함이 있었고 다시 보면 모든 화면이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패왕별희'로 익숙해진 경극이라 해도 처음 볼 때는 '꼭 저런 목소리로 노래해야 하나?' 하고 여전히 적응이 안 됐지만, 이 드라마를 좋아하게 된다면 두번째 볼 때부터는 경극 배경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검열과 가위질로 후반부 🐲용두사미🐍를 넘어서 용두사망😵‍💫🚑으로 가버리는 드라마가 속출하는 중국에서, 이 드라마는 감정을 잘 쌓아가다가 마지막회에서 주인공들 사이의 애틋함이 정점을 찍으며 끝난다(중간 회차 숨겨졌던 가족사가 좀 지루하긴 했지만). 요즘은 중국 당국이 드라마 내용 제한에 이어서 드라마 길이마저 "40회" 이하로 제한하게 되어서, 49회인 이 드라마도 만약 이 제한에 걸렸었다면 아마도 가정사 부분을 덜어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명대사가 여기 저기 숨어있다. 인간 대 인간의 교류, 사람이 가지는 감정의 종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됨. 영어나 스페인어 자막 등으로 bosom friend, alma gemela로 이해해야 하는 문화권에서는 절대 모를, 지음‘’知音‘’이라는 단어 속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한자를 배우면서 자란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我听着呢") 




대체 무슨 일인지, "음(知音zhiyin)이 뭔지 아세요?" 라는 주제곡 중 나레이션을 "consonante-음-이 뭔지 아세요?" 라고 번역해버린 스페인어 자막. 🤯 '知音'에 대한 굉장히 뭉클한 답이 이어지는데... 이 유튜브 영상을 본 스페인 사람들은 오역으로 이 질문-답변이 왜 뭉클한지 전혀 느낄 수 없게 됐다. '지음'에 Soulmate 의미의 단어를 넣어 번역해도 반쯤 이해될까말까인데 "자음이 뭔지 아세요?"라니...

한문을 알아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경극에, '소재 제한과 검열'이라는 국가적 특징이 낳은 -  은근하고 모호해도 애틋한 관계가 나타난다는 점까지 더해져 이게 바로 진정한 "중국" 드라마 아닐까.





5. 琅琊榜 랑야방 Nirvana in fire (2015년 9월 중국 방영) 총 54화


‘’我想选你 靖王殿下‘’

이 드라마 역시 '중국'이기에 만들 수 있는 내용. 2010년대 중반, 중국 드라마로 수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인 드라마지만 이걸로 입문하면 그 뒤 이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나기 힘들어서 늘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므로 솔직히 입문작으로는 비추. 개인적으로는, 무난한 중드 추천작들 보다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이 작품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전설의 '무한 회전문' 작품. 들어가보기 전에는 남들이 왜 그리 추천하는지 절대 모르겠는 그 세계.

기묘한 病과 맘대로 "customizing"한 맹독을 밑도 끝도 없는 '내맘이지' 의술 체계로 해결을 보는 것이 개인적으로 굳이 꼽는 이 드라마의 약점. "다른 중국 고대 배경 드라마들도 이런 독을 수시로 쓰는 것처럼, 여기서도 무슨 일이든 가능하지 않겠느냐" 보다는 극사실주의 극본으로 갈 수도 있었다고 생각함. 이 약점 빼면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일이므로. 하지만 원작에 "죽었던 이가 얼굴에 점찍고 복수하러 돌아왔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 라는 설정이 있는 한, 어쨌든 현실성에 큰 구멍이 생기기 때문에 작가로선 "판타지" 장치를 넣을 수 밖에 없긴 하다. 그래도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파고드는 내용이라 겁없이 보기 시작했다가 마냥 붙들려 있게 된다.




맛깔나게 상황에 맞춰 독성을 발휘하는 맹독을 신묘하게 치료하고, 사람이 푸드덕 🧚‍♀️하늘을 날아다니는 - 이런 류의 중국 드라마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시작 부분 연출이 조악해 보이는 것을 실소와 함께 참아내야 한다. 어떤 분이 쓴, "강추를 받고 시청을 시작했는데 1회에서 x🕊x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 소리지르며 껐다" 라는 글이 왜 그리 안 잊혀지던지. 그 장면을 넘기더라도 주인공이 마침내 얼굴을 확 드러내며 무동력 🚤타고 첫 등장하는 순간.. 다시 비명을 지르며 전원을 끄고 싶어질 수 있다. 🪈🫣 나는 이런 입문 장벽이 지나간 뒷부분부터 우연히 라이브로 보기 시작해서, 다행히(?) 채널 안 돌리고 계속 볼 수 있었다.🤭

낯선 호칭을 가진 등장 인물 수십 명이 정신없이 튀어나오는 것 역시 너무 고민하지 말고 참고 보다 보면 나중에 이해하게 됨. 어차피 진짜 중요한 인물은 몇 안 되고 결국 눈에 익게 된다. 처음에는 회차를 넘기기 어려워서 나도 10여 회 시청 후 쉬었다가 3개월 후에야 전편 시청을 완료했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촌스러워서 '으악' 하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에는 처연함과 비장함을 끝까지 잘 유지하는 세련된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 정도 연출력 유지하면서 '우리 중국이 이렇게 잘 났다'(??) 🤷 함정으로 안 빠지는 중국 드라마 극히 드물고, 같은 감독의 다른 연출작도 이 수준이 안 나온다. 이 드라마 이후로, 기존 권력을 재편해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내용을 제한하기에 앞으로 이런 소재 드라마는 중국에서 다시 제작되기 어렵다고 한다.




중반 이후 속도가 붙으면 54회라는 분량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고, 연출도 점점 유려하게 잘 한다. 50회쯤 되면 끝나가는 게 아쉽고, 54회가 끝나면 1회를 보러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다. 다시 보면 처음에 안 보이던 것이 다 보임. 처음 볼 때는 졸면서 보던 장면들이 두번째 보게 되면 모두 의미있게 다가오는 마법.

탄탄한 원작 소설을 쓴 작가가 직접 드라마 대본으로 만들었고 애절한 음악이 극 분위기를 잘 받치고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 본인 목소리로 더빙까지 한 남자 주연 2명 모두 200% 연기를 보여주지만, 만약에 '조연상'을 준다고 하면 한 두명 수상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모든 배우가 최대의 실력을 발휘했다. (조연 중 몇 명은 성우 더빙이라, 살짝 애매한 느낌은 있다. 국어책 읽는 연기력을 성우가 살려놓는 경우도 있어서.)

후반부로 진행되면서 배우들이 점점 역할에 젖어 들어 표정과 연기가 더 살아난다고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초반부 장면인데 마지막날 찍고, 감정이 폭발하는 후반 장면인데 촬영 초기에 찍은 장면이 꽤 있었다. 몇 개월 동안 그 인물을 연기해 오면서 감정이 쌓이고 쌓여 저렇게 울컥하나봐....는 나의 오판이었다. 극 전개상 25회랑 40회는 계절마저 바뀌는 시간차가 있고 배우들이 옷도 갈아입지만, 배우 얼굴 뾰루지 상태를 보면 아마도 같은 날 촬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장면도 있다.🧐 낄낄 웃다가도 촬영 시작하면 1초 만에 몰입하는 게 배우들인데, 내가 회차가 진행되는 순서대로 촬영 했을 거라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네.



제목부터 "그저 사랑뿐" 이런 류 드라마를 내가 골라서 보다가, 제목조차 깜빡하고 '😠저 사랑 타령 좀 그만 하면 안 되냐?' 하면서 시청을 중단하는 나같은 사람을 위한 드라마, 랑야방에는 절제된 감정만 드러난다. 미국 드라마에 절여진 눈으로 보니 이 드라마에서도 다음 장면에 행여나 남녀가 같이 누워있기라도 할까봐🫂 나중에 뜬금없이 여주인공이 부른 배를 안고 나타나기라도 할까봐🤰 걱정한 적도 있지만, 다행히 그런 장면은 없는 정치 복수극이다.

54회나 되는 분량에서,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최고 명대사가 고작 한국어 자막 6글자(중국어로는 8글자)라는 것이 오히려 이 대본이 얼마나 잘 짜여진 대본인지 증명한다. 게다가 그 '명대사' 라는 게 심오한 철학을 담은 대사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이 안에 너 있다"류의 플러팅도 아님. 촘촘하게 잘 배치한 인물 관계 덕에 모두가 놀랄 수 밖에 없는 순간을 한 마디로 만들어내는 대사이다. 인생에 이런 작품 하나 남긴 게 얼마나 뿌듯한 일일까 하고 배우들이 부러워진 드라마. 주연 배우 3명이 ost 한 곡씩 불렀는데 3곡 모두 드라마 분위기에 어우러져 처연하고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현시점 미국에서는 Succession, 중국에서는 랑야방이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보는데 나에게는 두 작품의 ost가 모두 상당히 매력적이다. 석세션 ost가 "재벌가 권력 다툼" 이라는 분위기를 우아하면서도 애잔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랑야방 ost 역시 바닥에 슬픔이 베어있는 권력 쟁취극의 처연함과 비장함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

중국 드라마에선 ost 가사가 있는 경우엔 자막을 화면에 띄우고 + 시도때도 없이 처량한 연주 음악을 밀어 넣으면서, 감정 강요로 오롯한 내용 감상을 망치는 비율이 거의 98%인데 랑야방은 연주 음악 & 가사가 있는 노래들이 모두 극 분위기를 잘 받치고 있어서 신기함. 랑야방과 거의 같은 제작진/배우들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伪装者'만 봐도 '으악, 제발 음악 좀 그만 틀어'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비해서 랑야방은 ost 선율이 뛰어나다. "작품성에 ost가 기여한다" -> 이 매칭이 힘겨울 때가 있는데, 석세션과 더불어 명작은 심지어 음악까지 하늘이 도와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





* 중국 드라마 특징 : '가족애'를 강조하는 한국에 비해 '주인공 쌍방 구원'을 상당히 좋아하는 듯. 주인공들이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는 경우가 거의 없음. 대부분이 이혼 혹은 사별, 부모님 캐릭터 배제 혹은 부모의 자식 착취.

중국 작가들은 홀로 남겨짐+트라우마 있는 주인공끼리 필연적으로 오직 서로만을 의지하며 "성장"하는 스토리 미치도록 좋아함. 양친 모두 모시고 자란 사람은 본인의 연애에 매달릴 리가 없다는 편견이 있는 건지 대체 뭔지. 

위의 드라마 1-5에 나오는 남주•여주만 봐도....


1. 주인공 어머니 1명 생존.

2. 남주는 아버지가 계시나 할머니와 살고 있고, 유일하게 부모 모두 생존한 여주의 가정이 따스하게 그려지지만 독립해서 산다. 따듯한 가정에선 사연이 안 생긴다는 위기 의식을 느꼈는지 1회부터 여주의 절친이 죽으면서 시작한다. 

3. 남•여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3명인데 이 3명을 모두 합쳐서 부모님이 단 1명 등장하지만 그분은... (최대 6명 출연 가능인데도)

4. 주인공 2명이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데 부모 아무도 안 살아계심.

5. 이 드라마도 주연 명단에 3명이 올라 있는데, 부모가 최대 6명이 등장할 수 있으나 부모 모두 몰살에 가깝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모친을 가진 주연은 단 1명, 그나마 살아 계신 부친 1명은 피와 살육의 아버지라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전혀 없다.


-> 1 -5 드라마 주연급을 총 11명이라고 치면, 부모가 최대 22명까지 존재할 수 있지만 극중 살아서 등장하는 친부모는 단 7명, 그리고 그 중 2명은 후반부에 사망. 2번 거유풍적지방에서만 친부모가 3명 출연해서 그 드라마 하나가 절반 가져간 덕에 7명이 되었을 뿐이지, 나머지 드라마엔 자식 잘 키워준 부모 캐릭터가 거의 없다고 봐도... 😶


댓글

  1. 랑야방의 '내맘이지' 의술 체계는 쓰다가 그냥 생각해 낸 단어인데, 뭐 상황에 맞게 작가 입맛대로 만들어 낸 치유법을 말하기도 하지만 더 생각해보니 '내MomEasy'의술 같기도... 의녀 직업이 이젠 본업이 아닌 우리 엄마지만, 약이 없어 앓아 누운 환자도 바로 다음날 회복시키는 내 Mom의 easy 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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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랑야방"이 나에게 특이한 점은, 대단한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꽤 여러 번 반복 시청했지만 선뜻 남에게 "내가 좋아하는"드라마야 라고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이상하게 들지 않는다. 매력적이고 푹 빠져들기도 했는데 '좋아하는' 것과는 묘하게 결이 다른.... 🤔. 위에서도 쓴 '석세션'의 경우 대단한 드라마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남들에게도 내가 좋아햐는 드라마라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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