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권일몽 - 纸片人으로 살 것인가 制片人으로 살 것인가





내가 몇년 전에 쓴 중국 드라마 입문 추천작 글에서, 중드 입문을 어렵게 하는 장벽으로⬆️ "1회에서부터 느끼는 거리감"을 들었었다. 1회에서부터 시청을 포기하게 만드는 작품이 의외로 많다.




1회에서부터 '항마력'을 시험하는 장면이 나와서 도저히 다음 회차로 넘어갈 수 없게 만드는 중국 드라마가 많은데 
그 부분을 넘으면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는 작품도 있다. 이런 식의 [시청자를 자체적으로 걸러내는 1회 - 살아남은 자만 볼 수 있는 블랙홀 뒷부분] 전개가 가장 극대화된 중국 드라마가 서권일몽 书圈一梦 아닐까 한다. (자매품: 랑야방 비둘기)


동영상 아님


제1화에서 4분 33초, 여기까지는 어찌어찌 보겠는데 그 다음 장면부터 '하...이건 아니잖아. 어쩌다 이런 게 2025년에 나올 수 있지? 이걸 내가 계속 볼 수 있을까' 🤯 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초반 6-7화쯤 꾹 참고 넘기면 굉장히 잘 써진 대본을 바탕으로 한 40회 짜리 드라마를 볼 수 있다. 앞에 나온 유치한 설정도 뒤로 가면 알차게 잘 풀어낸다. 중간중간 '아, 어떻게 작가가 이런 생각을 해냈지?'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복합 전개가 있다. 물론 이런 다층적 전개를 위해서 시청자가 "극적 허용"으로 눈감아 줘야 하는 설정이 있긴 하다. --> 가만히 서 있어도 어디서나 튀는 덩치를 가진 남자인데 그가 모자와 마스크만 쓰면 아무도 못 알아보고 목소리도 못 알아챈다??  🙇‍♀️🤷 흠...


이 드라마의 주제곡은 바로 그 어디서나 보이는 키 190cm 주연배우 刘宇宁이 부른 纸片人 - 📃 "종이 속 인간, 극중인물" - 이다. 도입부 연주가 극중 상황과 처연하게 잘 어울리는 분위기라서 몇 번 찾아서 들었는데 🎱 솔직히 도입부에 비해 뒷부분 멜로디는 크게 끌리진 않음.




인생의 비극적인 요소와 함께 코믹 요소도 잘 섞은 작품이라 술술 보기 쉬워서, 작년에 보고 올해 띄엄띄엄 두번째로 봤다. 두번째로 보니 왜 주제가가 하필 纸片人이었을까...느낌이 왔다. 이 드라마가 전달하는 내용 자체가 "남들이 써준 대로 종이 속 극중 인물 1,2,3으로 살래? 적극적으로 니 인생 써 나갈래? 라서.


纸片人 즈ǐ피엔런 - paper person, 극중인물 
制片人 즈ì피엔런 - producer, 제작자


종이 인간 즈피엔런과 중국어로 한자는 다르지만 소리가 같은 즈피엔런은 '영화 제작자, 프로듀서'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극중에선 "넌 그냥 캐릭터잖아. 프로듀서 아니라고" 라는 의미의 대사도 나오지만 반대로 이 드라마는 환경*운명에 갇혀 있지 말고, 각자 인생의 제작자가 되기를 권하는 드라마이다.

외국인인 나는 자막으로 이 대사를 보게 되어 느낌이 약하지만 중국어로 "너는 즈피엔런이야, 즈`피엔런 아니고" 를 들으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것 같다. 소리는 비슷하지만 (성조가 다름) 뜻은 차이가 크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 해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삶, 내 실수로 인생이 어그러지기 시작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남탓하고 복수를 꿈꾸는 삶... 시청자들이 내 거울을 보는 것 같은 캐릭터들을 극 중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수동적 절망을 떨치고 나가라는 --- 흔하지만 또 흔하지 않은 아이디어를 배열해 둔 드라마.

두번째로 보고 나서 이런 내용을 더 깨닫고 보니, 드라마 초반에 유난히 현대 중국 청년층의 분위기를 많이 담아내려 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咸鱼 :
"중국어 咸鱼[xiányú, 시엔위]는 직역하면 '소금에 절인 생선(염장어)'을 뜻하지만, 현대 중국어 넷상에서는 '노력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꿈이나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을 뜻하는 관용구로 주로 사용됩니다. 마치 죽은 생선(염장어)처럼 무기력하고 꿈이 없는 상태를 비유합니다. 
비유적 의미: 꿈이 없는 사람, 의욕 없는 사람, 잉여 인간, 현실에 안주하여 노력하지 않는 상태."
(출처 구글 ai)

한국 자막은 쭈그리/루저 등으로 나와서, 중국 사회 문화를 반영한 의미까지 전달하지는 못한다. 굳이 비슷한 한국어 표현을 찾자면 'N포 세대'정도


벽에 붙은 여주인공 삶의 모토 : 
"내가 대충 하면 남이 해준다
그냥 드러누우면 (=躺平) 될 대로 될 거야"


요즘 중국은 35세 정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취업난과 청년층에게 부족한 일자리, '치트키'로 인한 빈부 격차,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좀 침체되어 있다. 그래서 청년층 사이에 "열심히 살아봤자 소용이 없다"라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탕핑 躺平족 - 드러누워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삶 유지) 





1선线 도시, 2선线 도시... 모든 걸 등급 나눠 숫자 붙이기 좋아하는 중국에서 "18선 배우" - 인지도 거의 없는 배우 -인 여주인공의 방에는 시엔위 🐟 인형이 3개 이상 놓여 있으며 "대충 살자"를 삶의 목표로 하고 있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무엇 하러 열심히 사나?'

망해버린 대본이지만 그 속에서 종이 인간은 힘없이 어쩔 수 없는 결말로 끌려가는 것처럼, 뒤틀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그냥 염장된 생선으로 드러누워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나타낸 듯하다. 스스로 '나는 이 판에서 금수저 들러리 서고 있는 행인1일 뿐이구나'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

여주인공 삶의 목표를 초반에 왜 이렇게 강조했나 했더니, 纸片人 - 대본 속 종이 인간처럼 그냥 되는 대로 정해진 대로 살려고 했던 주인공도 制片人 - 내 삶의 프로듀서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랬나보다.

여주인공이 만든 칠판에 써진 작전 계획 제목에는 주인공 이름이 아닌 咸鱼逃命计划(= 시엔위 escape plan)이라고 써져 있어서 묘하게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시엔위의 탈출 계획? 🐟 시엔위로부터의 탈출 계획? 여주인공의 본명에 물고기鱼가 들어가는 것도 허투루 고른 이름은 아닐 듯.

중국 영화/드라마는 정부의 검열을 거쳐 정부가 원하는 방향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품만 나오게 되는데, 그래서 咸鱼 절인 생선처럼 그냥 운명에 순응하고 누워 있는 청년층을 계몽해보려고 이런 드라마가 나오게 됐나? 하는 생각마저 해보게 됨. 극이 시작할 때 주인공이 읽고 있던 대본은 청녕清宁一梦이었는데 마지막회에 눈을 뜨면 서권书圈一梦으로 바뀌어 있다. 



서권[계]몽이란 관점으로 보면,🧑‍🏫 "이게 대체 뭔?"이 절로 나오는 청녕일몽의 막장 대본은 "믿었던 것에 대한 배신과 억울함, 너도 찌르고 나도 찔려야 살아남는 가혹한 경쟁에 질려서 시엔위🐠가 되어가는 현대 중국 현실"을 드러낸 것이고, 서권일몽의 최종 대본은 '纸片人들이 각성하고 양보하고 연대했더니 다들 원했던 인생을 살 수 있게 됐다'를 보여주려고 만든 듯하다.

철저히 이 방향 관점에서 드라마를 보면 "해석 불가능하고 접근이 어려운 치트키를 독점해 살아남은 무능력한 기득권층"을 형상화한 등장인물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대사는 좀 노골적



이런 교육적 목표(??)를 빼더라도, "서권일몽" 은 작년에 봤던 드라마 중에서 각본상을 주고 싶은 잘 만든 드라마였다. 1화에서 '와 이건 부끄러워서 남들한테 보라고 못하겠다'같은 장면을 넘길 수 있으면, 인생에 대한 태도를 생각해본다는 측면에서 한 번 볼만한 드라마로 추천.



중국 드라마 중 "여주 성장 드라마" "대여주(女主)극" 이라는 것도 사실은 권력자 남주, 재력가 남주가 없었더라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한 스토리가 대부분이다. 여주인공의 성장 서사고 뭐고 일단 목이 달아나게 생겼는데, 여주에 반한 남주인공이 뿅 하고 나타나 권력/초능력을 써서 구해주는 고장극 드라마는 흔하다. (여주 성장물 = 남주 인맥물) 

여주가 역경에 처해도 '이제 곧 남주가 나타나겠네' 하며 긴장감이 전혀 안 생기고, 표면적으로는 '여주의 기지'로 상황을 돌파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자의 권력/재력'이 큰 기둥인 구조가 많다. 길거리에서 만난 나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 무맥락 사랑꾼 내 남친, 그런데 그의 죽마고우는 알고 보니 황제? 👑 이렇게 "빽"이 하늘 끝까지 닿아있는 설정이 많아서 여주가 아무리 역경에 부딪혀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어차피 남주 권력으로 해결될 것이 뻔한 여주 고난 에피소드를 줄줄이 늘어놓는 이유가 뭐지?' 하면서 지루함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결국 '그 재력남이 푹 빠지게 만든 게 곧 여자의 능력' '결혼을 통한 지위 상승으로 개인적 복수에 성공했지만 여자가 똑똑했으니 그 권력 이용 잘한 거지 뭐...' 이런 식 결론에 도착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여성 역할이 한정된 고전 사극에서는 불가피한 설정이니 이해해야 하지만, 중국 현대극에서도 '착하고 정의롭지만 현실 감각 떨어지는' 여주가 벌여 놓은 사고 처리반은 늘 남주의 역할이다. 서권일몽에서는 이 '남주의 구원' 클리셰를 철저히 이용해서 극을 끌고 가는 한 축으로 삼는다. 코믹, 황당부터 감동 클리셰까지 줄줄이 튀어 나온다.

유튜브 iqiyi 공식 채널에서 한글 자막으로 1,2화가 공개되어 있다. 많은 후기에서 드라마 뒷부분이 꽤 감동적이라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피를 토하는" 장면에 항마력이 떨어져 중반부까지가 더 재미있긴 했다. 피 토하는 희생이 감동을 자아내야 하는데, 나는 웃음이 먼저 터짐. 💢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드라마는 '틀을 깨는 듯하면서도 틀에 갇힌' 드라마가 되어, 중드 특유의 이분법 도식을 못 벗어난다는 것. "문관은 복잡한 사람이나 유약하며, 무관 집안은 대대로 단순하고 용감하다" "도시 사람은 합리적이고 진취적 + 시골 사람은 막무가내이고 도시로 간 가족 착취에 혈안" "여자는 감정적, 남자는 이성적" 이분법에서 못 벗어나는 중드 대본이 꽤 많다. 여자 주연이 이 "감성😍" 노선을 택했을 경우, 대부분 남주/여자 조연이 더 현명하고 이성적 조언을 잘 해준다. 


명백한 죄를 지은 가족의 죄를 용서해달라며 황후/후궁이 황제에게 뛰어들어 오히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장면은 이 드라마 저 드라마 반복되어 지겨운데 여전히 서권일몽에도 등장한다. 여자는 '정무적 판단이 안 되고 감정에만 호소한다' 도식에 지배되어 있는 것 같음. 여기서도 여자 주인공은 인류애가 넘치는 정많은 사람이지만 중후반부까지 한 방향에 꽂힌 생각만 하는데, 남자 주연은 처음부터 일관적으로 "내가 왜 종이 속 인간이야? 나 살아있는데? 내 인생을 왜 남이 쓰게 놔둬?"를 주장하며 상황을 돌파할 생각을 하며 여주를 이끌어 준다. '纸片人- 극중 인물' 개념을 알았을 때 남자 역할은 시종조차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서 주인공에게 위안을 주며(31,35화), 남자 악역도 "내가 왜?" 라는 질문 하에 어떻게든 (n) 운명을 개척해보려 한다.

클리셰 투성이 다른 드라마를 꼬집는 대사가 많지만, 다층적 구조를 택한 이 드라마도 시공을 넘나들어 결국 중국 드라마 특유의 "부모를 일찍 잃은 (햇살) 여주 + 권력•재력은 있지만 외롭던/싸가지 없던 남주 맺어짐" 클리셰는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 드라마에는 유난히 어릴 때 양친이 모두 돌아가신 주인공이 많은데 여기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아무리 시공간을 오고 가도 
마지막은 언제나 돈 많은 권력남 or 스타가 나를 알아봐줌. 

40회 동안 피를 토해가며 노력해서 정해져 있던 결말을 뚫고 나왔지만, 다시 우리는 늘 예상 가능한 범위의 판에 박힌 결말이 쓰여진 대본 안에 결국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해피 엔딩이라고 부른다. 이 드라마의 영어 제목은 A dream within a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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