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 '옛날' 사람들은 TV 드라마를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서 앉아서만 봐야 했고, 마음에 드는 장면을 다시 볼 방법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뭐... 요즘은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고, 무한 반복 무한 재생이 가능하다.
최근 한국/미국 드라마보다 중국 드라마를 자주 봤다. 솔직히 각본 개연성이나 출연자들의 의상 상태 같은 것은 한국/미국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워낙 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기에 몇몇 배우들의 연기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단발성 출연자들의 '진상'손님, 길거리 '행패' 연기는 모든 걸 뛰어넘는다 😁
의상도 우리와 문화권이 달라서 그런지 문제가 좀 있고... 몇몇 드라마를 보면 여배우들이 한국에선 잠옷으로나 적합할 만한 옷을 입고 '출근'한다. 😨 중국드라마엔 자동차 브랜드나 외국 옷 브랜드에 집착하는 장면이 유난히 많아서 외양과 체면을 엄청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서는 출근 복장 허용 범위가 한국보다 매우 넓은 것 같다.
남자친구의 초대로 휴양지 특급 호텔로 온 여자친구의 의상이라 하기엔 너무 놀라운, 노란 옷 여주인공. 심지어 회색 운동화에 맞춰서 회색 양말 신고 있음 🤦♀️ |
2020년에도 등이 드러난 옷 입고 세수할 때나 쓸 것 같은 띠 머리에 두르고 '펀드'회사 다님😨 |
잘 나가는 로펌 다니는 변호사의 경악할 출근 복장. 역시 길이가 매우 짧음. 출근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대체 저 리본 무더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극중 재벌의 귀한 딸 설정으로 나온 배우가 입은 아...동...복...?!? |
상하이 증권 회사 인턴, 찢어진 청바지 입고 출근 가능 |
잠옷 입고 동네 돌아다님🤯, 잠옷 입고 가족 외 인물 만나는 장면 많음. 특수상황 아님. |
그래도 여주인공이 같은 옷을 여러 번 입고 나오는 것은 맘에 들었다. 한국 드라마의 몰입 방해 요인 중의 하나가 곤경에 처한 설정의 여주인공이 그 와중에도 매일 옷과 가방을 바꿔서 나오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병원에서 생사를 넘나들어도 마스카라와 눈화장을 포기 못하는 것은 한중 모두 마찬가지.
망막 수술을 앞두고도 마스카라는 포기 못하는 주인공 😕 |
어쨌든...
내가 본 몇몇 드라마 중에서 연출, 대사, 연기, 음악 등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다시 봤던 회차를 정리해볼까 한다, 사실 스포일러 문제도 있고, 저작권 문제도 있으니 제대로 쓰기는 애매하지만.
보통 40분 분량으로 40회를 넘기는 중국 드라마에서 가장 연출 역량이 최대 발휘된 회차로, 중드를 보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꼭 보고 넘어가야 된다고 소개할 만한 부분들이다. 사실 중국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뒤 나는 영상을 1.5배속 심할 땐 2배속으로 돌려서 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불필요한 조연 서사 분량과 촌스러운 연애질 때문ㅋㅋ. 그 중에서도 1.5배속 돌리지 않고도 볼 만한 회차들.
1. 三十而已(2020) - nothing but thirty
현재까지 중국 현대극 중에서 가장 세련되게 연출됐다고 평가받는 작품, 지루한 부분은 있을지라도 촌스러운 부분은 많이 사라졌다. 여성 시청자를 노린 여자 3명의 우정 이야기지만, 입소문이 퍼져 의외로 한국 남자들도 많이 시청하고 평을 내놓았다는 특징이 있다. 나는 솔직히는 일부 남자들의 감상평 - 여자 주인공 몇몇이 허영이 심하다는 말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렇게 몰입하지는 않았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여러 번 다시 본 부분은 38회, 40회.
주인공 중의 한 명인 童瑶의 열연과 어우러지는 음악의 사용이 정점을 찍는 회차들. Spoiler가 될 수 있어 내용은 못 적지만 한 사람의 나쁜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주는 타격을 아프게 그려냈다.
중국은 인구도 많고 방송국도 많으니 한 해에 어마어마한 수의 드라마가 제작되고 방영되고 동시에 사장된다. 그 수많은 드라마 중에서 童瑶는 이 드라마 열연으로 2021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국처럼 방송국마다 '본사 시청률순 공로상'을 '연기상'이라면서 남발하는 것이 아닌, 수십곳 방송사 통합 시상식 3개 중 하나에서 1인 수상이니 공신력이 있다고 할 만하다. 중국 배우들은 드라마 타이틀이 나올 때의 이름 순서로 자존심 싸움을 한다고 하는데, 江疏影이라는 배우가 왼쪽에 이름이 먼저 나오고, 드라마 시작 부분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레이션을 했기에 사실상 그녀가 제1주연으로 각본이 쓰여진 듯 한데 이를 제치고 童瑶가 주연상을 받았다.
몇몇 한국 여배우처럼 충격의 딱 그 순간에 눈동자를 여기저기로 굴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가로저으며 연기하는 게 아니라 과장되지 않은 동작 반응으로도 충격을 표현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충격을 소화하는 시간 동안, 중요한 대사는 아니지만 공감했던 대사를 하나 소개.
"我不喝酒得吃药了 醒着太难过"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약을 먹어야 돼.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
2. 我的前半生 (2017)
2020년대 중국 드라마만 본다면 모든 송금과 결제가 스마트폰으로 순식간에 끝나고, 앱 덕분에 길거리에서 택시 잡느라 고생하는 장면도 없다. 처음 본 사이에도 뿅!하면 송금이 되기에 드라마 40회 보는 내내 주조연들끼리 돈 보내다가 끝나는 드라마도 있다💸. 하지만 2017년에 방영된 이 작품을 보면 기술 발전의 과도기인지, 현금이 손에서 손으로 오가고 지폐로 밥값을 지불하고 택시 잡느라 고생하는 장면이 많이 나와서 3년 사이에 많은 게 변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드라마 설정상으로는 30대이지만 실제 주연 배우들이 40살이 되어 연기한, 최소 30대 이상이 더 공감하는 일명 '으른' 로맨스이다. 결혼 생활이 길거나 연애 기간이 길었을수록 이해하는 측면이 많을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보통 이 드라마를 '여주 성장물'이라고들 하는데, 찬찬히 뜯어보면 여주인공이 외적 매력이 있고 + 압도적 인맥을 가진 남자의 결정적 도움을 많이 받아 상사의 신뢰를 얻는 (the Devil wears Prada 같은) 내용이라, 나는 그 측면을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는다. 여주 성장물 = 남주 인맥물??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은 회차는 31회(편집에 따라서는 32회 맨앞 장면), 36회.
28회에는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한 장면으로 관계 설명하기 | Nothing matters. (mori-masa.blogspot.com)
31, 36회는 오래된 관계, 책임 지려는 관계, 새로 시작하는 관계, 결혼 결심의 이유, 의리에 대한 고민, 노년의 사랑까지 ... 수많은 "관계"의 종류를 다 볼 수 있는 회차들이다.
이 작품 역시 주연배우 马伊琍가 위의 三十而已 배우처럼 통합시상식에서 2018년에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실 나는 그 배우의 연기에 크게 감명받은 적은 없으나, 남녀 서로의 감정이 폭발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여자 배우가 상대 배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래를 보면서 대사를 한 것이 신선했다. 늘 그런 장면은 남녀가 서로 바라보며 눈빛으로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만 봐와서👀... 남자 배우는 연기로는 욕을 먹지 않는 유명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절절한 회차에서 표정이 다양하지 않고 연기 기술이 한정되어 있는 게 아쉬웠다. (상대방이 답답할 땐 고개를 한번 옆으로 돌린다든지, 곤란할 땐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는 거라든지 -> 어떤 회차를 봐도 각각 다른 상황에서 그 단 두 가지 동작으로만 심정을 표현해서 🤦♂️... 그냥 목석같다.)
뻔한 말인 것 같지만 사실 꽤 중요한 대사는 "我不希望看到你再受苦" - 니가 또 고생하는 건 못 보겠다
이 감정이 관계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 이 드라마도 결국 이것 때문에 이렇게 됐다. 이 마음이 절절할 때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고 곁에 맴돌게 되지만, 시간이 흘러 이 감정이 흐려지면 - 니가 힘들어도 난 모르겠다 - 배신과 이별이 따라옴.
그건 현실에서도 남녀 관계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관계까지도 적용된다. '니가 힘들겠지만 그래도 난 어쩔 수 없다'... 이거 참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다못해 대학교에서 조별 과제를 해도, 남이 고생하는 걸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사람과 타인이 고생하면 안 되니까 그래도 도우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에 대해 느낄 수 있는 심정은 천지 차이다.
3. 平凡的榮曜 (2018년 촬영, 2020년 방영)
미생의 '정식' 리메이크작. '정식'을 강조하는 건 그냥 말없이 베끼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 한국 작품을 제한하는 한한령 때문에 찍어놓고도 2년 만에 방영됐다.
사실 원작 미생 드라마를 제대로 안 봤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이 '平凡的榮曜'를 별 설명도 없이 몇 십초 보고 나서 금방 '이거 미생이잖아?' 했을 정도로, '원작을 보지 않았는데도 리메이크작임을 알아본 작품'.
한국에서 미생의 여러 장면들이 워낙 유명해서 여기저기 인용이 되었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중국판은 한국판 대부분을 충실히 재현했다. 남녀가 정분으로 얽히지 않는 이런 드라마 류를 좋아한다. 게다가 중국 드라마 중에 거의 처음 본 작품에 속해서 배우를 단 한 명도 몰랐기 때문에 진짜 회사원들 보는 기분으로 집중해서 볼 수 있어서 더 좋게 기억에 남은 듯.
연출이 잘 된 회차는 25회, 34-35회, 40회.
에피소드를 잘 살렸고, '장그래'역 25살(촬영 당시) 주연배우 白敬亭의 적재적소 적합한 표정 사용, 몸 사용, 걸음걸이 사용이 돋보인다. 중국판 미생은 한국 원작의 장그래보다 오과장에 중점을 둔 각색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에겐 '장그래'역 배우가 더 돋보였다. 이 안쓰러운 주인공 연기를 위해 183cm의 키에 57kg까지 감량했다는 설이 있다. 배우가 캐릭터 연구 끝에 넣은 설정같긴 한데, 종종 머리 긁적긁적하는 것만 안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할 때마다 매우 안 어울림. 이 배우의 연기폭을 보려면 28회도 보면 좋다.
34-35회 연출은 이 블로그에 이미 소개 - 연출 | Nothing matters. (mori-masa.blogspot.com)
거의 끝에 다다른 40회의 회식 장면은 실제로 白敬亭의 마지막 촬영 회차였고, 4개월간 촬영해 온 인물의 인생에 배우가 한껏 몰입해서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연기가 뛰어나다. 볼 때마다 눈물남.
한국 '미생'도 부장님 차장님 과장님 사원 역할을 한 수많은 조연들을 조명받게 한 작품이듯이, 중국판도 주조연들의 진짜 회사원같은 연기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딱히 꽂힌 대사는 없다. 전체적으로 쓸쓸한 배경 음악 사용도 맘에 든 작품.
그냥 앞으로 써먹기 좋은 대사를 하나 꼽자면
"未到终局 焉知生死" - 의역하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이런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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