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





무심히 지나쳤던 디테일, 생화 장식.
100만이 안 되는 화소의 오래된 아이패드 사진은, 가끔 보면 사진 아닌 회화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배경은 화장실.
🛀🏻 🛁


Regent street, 2014년






무슨 일인지 차량 통행을 막아놓아서, 차도로 걸어다녔는데 
그때 잠시 찍었던 영상을 오늘 제대로 보니

" Traffic free 
Sundays
in July"

"Summer 
streets"

라고 현수막에 써있다.


그런데 내가 저기 갔던 날은 6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50경이었는데...😶




모르던 일




전에 알던 분이 (마지막으로 뵌 지는 4년 가까이 됐지만...) 작년부터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계시다.

평균적인 대한민국 50대의 모습을 지닌 분이라
요즘도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사진을 보다가, 비슷한 분을 마주쳐
'앗 그분?' 하고 움찔 놀랄 때가 있다. 그러다가
'참, 그분 구치소에 계시지... 밖을 돌아다닐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
뭔가 신기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오래 살았구나...하고.

아는 사람을 거리에서 절대 마주칠 수 없는 이유가 "구치소 수감"이 되다니....


한동안 뉴스에 많이 등장했던 그분은, 이제 일명 '볼드모트'가 되셨다.
난 사실 해리 포터를 본 적은 없지만, 볼드모트의 용례는 알고 있다.
차마 부르지 못하는 이름....

나와 그분과 같은 단체에 속해있던 어떤 사람이 저작물을 냈는데...
"홍길동 선생님, 철수 선생님, 영희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이런 식으로 이름이 빠진 채 그분을 지칭하는 감사의 글이 있었다.
👻


조용히 사는 것 같아도
모르는 새에 이런저런 경험이 쌓여가고 있다.



그저 잠시 겹쳤을 뿐



이 험악한 연말연시를 넘기면서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왜 벌받는 걸까

올해는 몇 년 만에 연락이 되어 내 인생 안으로 다시 들어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내 인생 밖으로 걸어나간 듯한 친구도 많았다.

기약없는 약속을 남긴 채, 아무리 해도 만나지지 않던 친구들.
바빠도 바빠도 진짜 보고 싶으면 진작 만났을 텐데, 1년 넘게 만나지지 않는 친구들은 결국 서로가 보고 싶어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왜 내 인생에서 걸어나갔을까.



언젠가 같이 걷던 길에서 서로 다른 길로 걸어나가는 것은 이 책에 나온 "love" 경우 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자식. 친구 관계 모두 이렇게 '갈라섬'이 가능하다.
나이 들면서 인간 관계가 마구마구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들면서 줄어드는 인간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될 듯 하다.


윗 그림은 "Romantic movement(Alain de botton)"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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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26 추가
7년이 다시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새로 만나는 사람만큼
멀어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때 같은 방향으로 세상을 보면서 대화가 너무 즐거웠던 사람들이, 
몇 년 지나면 도저히 같이 대화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있기도 한다.
당연히, 상대방에게 나도 그런 사람이 되었을 테고.
잠시 길이 겹치는 동안 행복하긴 했지만....
서로 안 맞는 걸 알면서 멀어져 가면 씁쓸하긴 하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모든 인생들이 저렇게 스쳐 지나가기에, 큰 미련은 두지 않으려고 한다.





그땐 미처 몰랐지




"니가 30대, 40대쯤 어떤 형태의 삶을 원하게 될지
10대, 20대일 때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보다 어린 세대가 있다면
주제넘게 한번쯤은 해주고 싶은 말.

나같은 경우는, 내가 혼자 사는 것을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데
그것이 상당히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예측을 못해서
20대부터 알차게 돈 모으는 것을 못했다.
그때부터 차곡차곡 돈을 모은 친구들은 지금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잖아?' 이런 은근히 김빠지는 격려 말고
막상 바꾸려 해도 누적된 것 때문에 안 되는 일도 있다.

50대가 되어 보니, 자신은 아기 낳고 키우며 남편이랑 오순도순 사는 게 행복인 사람이었는데
20대부터 자신에게 결혼은 맞지 않다고 생각되어 너무 철벽을 치며 살아왔더니
50살에 이르러 결혼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 되어있을 수도 있고....


20대에 아기가 너무 예뻐서 둘,셋을 낳아놨더니
40대에 이르러 자신은 남들을 돌보고 자신을 뒤에 놓는 게 너무 안 어울리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아이들을 도로 뱃속으로 집어넣을 수도 없는 일인....

그런 거.



내가 만약 자식을 낳는다면
3,40대쯤 "아, 인생이 이게 아니었구나"하고 깨달을 때
조금 도움이 되도록, 다른 길을 가 볼 수 있도록, 그때에 가서만 쓸 수 있는 돈을 좀 준비해놓은 뒤에 아이를 낳고 싶다.
'성인이 되면 네 인생 네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며 자녀 인생 초반기만 다 투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을 때 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요만큼 살아 보니, 한 번뿐인 인생...인생 초반의 판단이 너무 덧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고 훌러덩 지나갔던 사람들은
인생에 언젠가 한번쯤은 고통의 시기를 다시 겪는 것 같다.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본인도 괴롭지만 주위 사람도 괴롭히는 그런 알 수 없는 병.



Escape on impulse





사춘기 자녀를 여행에 데려갔더니, 말 안 듣는 자녀땜에 고생했다는 경험담을 읽다가
어렴풋이 머리 속에 떠올랐던 18년 전 남동생의 모습.

삐딱하던 남동생이 찍힌 그 사진이 머리 속에 그려졌었는데
오늘 보니 그 사진을 12년 전에 무슨 일인지 내 싸이월드 소개 사진으로 쓰고 있었다고 today's history가 알려줬다.






Escape on impulse는 아마 "콜드 마운틴"이라는 소설의 소제목들 중의 하나였을텐데
왜 이걸 소개글에 썼는지는 모르겠다.



이젠 아련한 사진.
모든 가족이 같이 갔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해외여행. 




왜 댓글이 안 달릴까




솔직히 내가 여기에 뭔가 틀리게 쓴 것이 있으면 누군가 정정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싸이월드 블로그하다가 구글 블로그로 넘어오니, "모르는 사람"의 댓글을 보기가 정말 어렵다.
친구들이 두 번 댓글을 써준 거 빼고는, 스팸 외에 그 어떤 댓글도 보지 못 함 ㅠ.ㅠ


싸이 블로그 시절에는 ....
어떤 호텔의 9천 원대 저렴한 점심 뷔페 행사가 끝날 예정이라 아쉽다고 썼더니, 그 호텔 매니저가 어찌 알고 찾아와서 직접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댓글을 달아준 적도 있었고,
멕시코 몬떼레이의 대학교에 갔다가 4만 석 규모의 엄청나게 큰 축구장을 보고 '대학교 축구가 대단하다'고 썼더니, 누군가가 여기는 학교 축구단이 아닌 프로축구단의 구장이라고 댓글을 달아 알려준 적도 있었다.


방금 우연히 어떤 블로그를 보다가 정규 체크인 시간이 오후 4시인 호텔인데 (내가 전에 방문했던 곳이라 알고 있음)  글쓴이가 그것을 몰랐는지 2시에 도착해서 왜 체크인 시간을 넘겨서 왔는데도 방을 준비 안 해놨냐고 난리를 쳤다는 글을 읽으니 뭔가 속이 답답해졌다. 외국에 있는 호텔인데, 의사 소통이 원활치 않으셨던 것인지.... 막 화를 냈을 정도면 영어가 어려운 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 블로그 사이트에 내 아이디가 없어서 엄마(!)의 아이디로 로그인해서 조심스레 댓글을 달다가 그냥 그만 뒀다.
뭔 오지랖이람.


새삼 모르는 사람 글에 댓글 달기란 어렵다는 것을 실감.
내 친구가 만약 그런 글을 썼다면 "야, 너 왜 그랬어? 그 호텔 체크인 시간이 원래 4시야." 라고 댓글을 편하게 썼거나, 친구가 망신스러워할까 걱정된다면 쪽지를 보내거나 했을 듯.


어떤 분의 경우는 본인이 앱에서 체크인 시간을 지정해놓았다며 그 시간을 지켜서 왔는데도 방이 없었다고 난리를 치는 분도 보았는데 그것 역시, 앱에서 투숙객이 지정하는 것은 얼리 체크인 "요청"일 뿐, 호텔의 확약이 아닌 경우다. 앱으로 방이 준비되었다고 알람이 와야 방이 준비된 것인데, 그걸 모르고 화를 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내 글에 대해서도 누군가가 "이 사람은 왜 규정도 모르고 이렇게 서툰 글을 썼을까?" 하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지 말고,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읽다가 가장 부끄러운 종류의 글은, 사진에 뭔가 명백한 증거가 나타나 있는데 글에는 엉뚱한 내용이 나와 있는 경우;;;; (예전에 au bon pain from Boston 이라는 매장 내부 사진을 찍어놓고 그 아래에 "오봉뺑은 프랑스에서 온 카페 브랜드라고 해요"라고 소개한 블로그를 본 적이 있다)
내 글에도 이런 실수가 있다면 누군가 알려주면 좋을 텐데...


예전에 테니스에 대한 글을 많이 쓸 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신 분께서 "뭔 ㅂㅅ같은 소리야?" 라며 악플을 달아 준 적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와서 정성스레 의견을 내놓은 댓글들은 대부분 반가웠었다.
몇몇분은 질문을 위해 따로 나에게 메일을 보내기도 했었고.

한국의 대세인 네이버 블로그보다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꾸며 구글 블로그에 새로 둥지를 틀었는데,
싸이월드나 네이버 같은 막강한 한국 회원망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처음엔 영어로도 좀 글을 써볼까 생각을 했으나, 하도 오랫동안 영어를 안 썼더니 이제 영어도 안 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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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텔은 예약 확정이 되면 체크인 시간이 4시라는 이메일을 보내준다.
그리고 오전부터 앱에서 스마트폰 체크인을 하면, 오후 4시 이전이라도 방이 준비되면 알람이 온다.
편리하게 만들어놓은 앱 사용을 한 것도 아니고....
세상의 모든 호텔의 체크인 시간이 2시라는 편견을 가진 채 본인이 규정을 안 읽었으면서, 직원을 만만하다고 여기고 컴플레인하겠다며 큰소리 뻥뻥치는 스타일의 사람을 매우 싫어하는 지라....
그런 사람에게 그 사람이 실수한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대신에 나의 공간에 그 오지랖을 풀고 있다 :)

나도 남의 글에 댓글 달기 조심스러운데, 내글에 댓글 달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


내가 알던 곳



2004년부터 2006년까지 TV 9시 뉴스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가장 마지막 부분에 "국제팀" 뉴스가 하나 들어가는데 (그날 세계에 큰 일이 없어도 그냥 하나는 꼭 넣는다) 어떻게든 뽑아내려다 보니, 가장 자주 나왔던 것은 "이라크 차량 폭탄 테러로 XX명 사망" 이 기사였다.

늘 나오는 기사라서 다들 둔감해질 정도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자주 폭탄이 터지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지? 안타깝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2007년, 다수인 불교계와 소수인 힌두교계가 내전 중이었던 스리랑카에서 2년을 살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의를 듣고 가긴 했는데, 우리가 도착한지 하루 만에 실제로 큰 폭탄 테러가 터졌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번화가 옷가게에서 발생한 사고라서 사망자가 십여 명이나 나왔다.


랑카 정착 초기에는 빡빡한 여러 프로그램에 따라서 움직였었는데,
다음 행선지로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 옷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누군가의 생사가 갈린 현장을 사진이나 찍고 있던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이 사건을 잊었겠지.
10년 전의 일이라서...당시 나도 긴장했었는지, 아니며 덤덤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2년을 지내면서 든 생각은 "아니 저렇게 폭탄이 자주 터지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 라는 걱정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별 의식을 안 하게 되고, 어쩌면 그냥 운명에 맡기게 된다.

내가 자주 타고 다니던 154번 버스 정류장 옆에 그 버스에서 폭탄이 터져서 윗부분이 시커멓게 불탄 사진이 붙어있었지만, 그냥 덤덤하게 그 버스를 끝까지 이용했다.

내가 수도 근처 내 집을 떠나 (몰래) 다른 도시에 놀러갔었던 어떤 날에는 아주 허름한 형태의 전투기? 비행기? 한 대가 수도 상공을 날아서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자기 근무지를 이탈하면 꼭 보고서를 내야 하는데, 대부분의 단원은 모두 무단 이탈을 했었다. 나는 범생이(?)라서 늘 보고서를 내고 근무지 이탈을 했었는데, 그때 거의 유일하게 보고없이 내 근무지를 비운 날이었다.  비상연락이 돌던 그때, 근무지 이탈이 걸릴까봐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이 도시 저 도시에서 폭탄이 터지면 걱정은 되지만, 한편으로는 다들 "야, 그 도시에서 터졌으면 당분간 거기서는 안 터져. 거기 놀러가도 안전해." 이러곤 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엄마께서 영국에 가실 때도 런던 테러가 자주 났었지만, "엄마, 테러가 한 번 난 곳은 얼마간 발생하지 않아. 그냥 다녀오세요." 이랬었다.

내가 속한 단체에서는 대중교통 이용을 금하거나, 유사 시 수도로 일시에 집결하는 훈련을 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모두 무사히 2년을 보냈고, 나의 임기 종료를 6개월 쯤 남겨두고 내전은 종식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6개월은 비교적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전세계에서 테러가 빈번한 요즘, 한때 나도 테러가 흔하고 큰 건물에 들어갈 때는 꼭 검문 검색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라에 살았었다는 게 갑자기 기억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계 사람들이 스리랑카 테러는 잘 몰랐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파리에서 테러가 나서 사람들 소셜 미디어가 "pray for Paris"로 물들었을 때, 그걸 비웃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시리아 같은 곳에서 매일 사람이 죽어도 "pray for Syria" 이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다들 파리 가지고 난리냐? 허세다. 그런 내용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 인지도나 친밀도, 방문 경험....그런 것에 비추어 보면 프랑스와 시리아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다시 많은 사람의 생사가 갈린 사건이 발생한 이 순간에도
옛 기억이나 들추고 있는 태평한 나.....
하지만 한국 밖의 누군가는, "저렇게 전쟁 위협이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


여성참정권 획득을 위해 다소 과격한 시위를 했었던 분들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저 분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여성 투표권의 도입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겠다. 여성의 '이성'을 억압하던 시대에 결연히 나선 그분들의 희생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서프러제트 여성 지도자가 나와서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기에 우리는 이제 (과격)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고민이 되기는 했다. 저 논리는 결국 ISIS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물론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불특정 다수의 인명 피해는 없도록 하기 위해 조심했기에, ISIS와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어떻게든 주의를 끌어 목적을 성취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목적은 결국 같은 것 아닐까.

아...복잡하다.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도 죄없는 사상자가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위의 스리랑카 테러 때에도 폭발 때문에 화상을 입은 아이가 너무 괴로워서 "엄마, 저를 이만 보내주세요" 했다는 기사를 분명히 읽은 기억이 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과 목적이 같지 않기에
충돌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이지만
어떻게 하면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원만한 타협을 이룰 수 있을까.







흐릿한 기다림




2012년에 친구에게 컴퓨터 윈도우 재설치를 부탁했다가, 그 친구가 내 하드 디스크 저장 내용을 다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정말 근래 최대의 충격이었다.

14만 원인가 내고 ㅠ.ㅠ 하드 디스크 복구를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진을 살려냈지만
무슨 사진이 날아가고 무슨 사진이 남은 것인지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에야 클라우드 저장을 시작한 것이 후회된다. 컴퓨터 하드이든, 외장 하드이든 사실 순식간에 정보가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나마 클라우드가 안전한 대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클라우드 제공 업체가 사업을 접으면 또 새로운 저장매체를 찾아 헤매야 한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2009년 8월 어느날에 우리 고양이를 찍었던 사진들이 많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방안에 얌전히 앉아있는 게 귀여워서 찍었는데, 얼굴을 찍고 싶어도 아무리 해도 고개를 들지 않아
부엌에 가서 미끼용 멸치를 가지고 오니 말그대로 "지X발광"을 시작해서
거의 모든 사진 속 고양이가 다 흔들리게 찍혔던 것만 어슴푸레 기억이 난다.
우리 고양이 이름은 (식)탐이로, 먹을 것 앞에서는 정말 물불을 안 가린다. (조리 중인 가스렌지에도 들러붙으려 했었다)






몇 장은 영영 사라지고
몇 장은 남았는데
그 중의 하나.
그나마 선명하게 찍힌 사진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발광을 하다가 그래도 내가 멸치를 안 주니까 한 발 물러나 얌전해진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


공개하는 김에, 발광하는 모습도 공개할까? 😺








기억 속의 이 흐릿한 모습,
지금은 아마....살아있지 않겠지?


그래도 언젠가 만날 날을 기다린다.



8월 11일 서울 하늘











봄부터 미세먼지에 시달리며 파란 하늘을 어렵게 보다 보니
파란 하늘이 나타나면 무조건 카메라로 찍게 된다.


오늘은 특히 구름이 크고 특이했다.
외국에서 보던 구름,
서울에서 드물게 보던 형태였다.
(특정 나라에서 구름에 대한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일본에 갔을 때 '여기는 한국보다 구름이 크군'하고 느낀 적은 있다)



뭔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구름들






통유리창이 있는 전망좋은 호텔에 하루쯤 머물렀더라면 매우 좋았을, 그런 날.


내가 만든 팟타이







소스를 사서 첫 도전.
그럭저럭 맛나네.
푸드트럭 같은 장사를 할 때,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인 듯.
만들어놓고 보니, 한국 음식점에서 15,000원씩 받는 게 이해가 안 가는 음식이넹.


나는 참 꾸준하구나...

소나기_01


더위를 식혀준 여름 소나기.

전선에 매달린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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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십여 년 전....
집에 있기가 눈치보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홍대 앞 커피빈에서 찍은 사진.
 
 
 
ㅂㅂ
 

극단적인 형태 - Bug chaser

 


생전 처음 보는 단어 bug chaser.
상담 관련 책 읽다가 발견.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최근, 게이 동성애자 중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려고 애쓰는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Freeman, 2007). bug chaser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형제애를 누리기 위해” HIV에 양성인 남자(AIDS 감염자)들을 찾아 다닌다(Freeman, 2007, para. 5)."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Schoenewolf (2008)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신과 의사인 Antoine Douaihy는 정신 착란과 우울, 정신적 질환이 이러한 자기 파괴적 행동을 이끈다고 하였다. “Bug chaser들은 어떤 친밀감을 원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무엇엔가 속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함을 유지하는 이유 중에서도 왜곡된 형태죠.” Douaihy가 말하는 왜곡이란, bug chaser들이 병 · 죽음을 유대감과 연관시키는 것을 말한다. Bug chasing은 특정 게이 동성애자들의 죽음에 대한 갈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형태가 될 수 있다."



- Counselling Theory and Practise (Edward S. Neukrug) 중에서 생존본능과 죽음본능을 설명하는 파트에서 나옴.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조성하려는 내용이 아니고, 친밀감을 갖기 위한 인간의 노력 중 병적인 형태에 대한 이야기이다. 환자로서의 유대감과 소속감을 갖기 위해 일부러 불치병에 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이 단어를 알게 된다면, 이렇게 쓰여진 단어는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
곤충 애호가가 아님.
가끔 외국어로 이상한 뜻이 써진 옷을 모르고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잖아.

포인트의 노예




야동을 아예 한 번도 안 본 사람도 있고, 야동을 백만 번 본 사람도 있지만
야동을 딱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야동의 중독성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야동 첫 관람에 어떤 심리적 장벽이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 장벽을 한 번만 넘어서면 멈출 수 없다는 뜻.

왠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안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라도 한 번 봤다면 나 역시 "백만 번"의 세계로 빠져들었을 거다.
하지만 나에겐 '굳이 남이 하는 것을 내가 봐야 하나?'하는 심리적 장벽이 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자기가 사는 도시에 호텔비 지출하기"가 있는 것 같다.
(여럿이 방을 빌려서 파티하다가 모여 자거나, 출장 온 사람 덕에 공짜로 자는 것, 돈 나눠내는 것 말고, 본인 숙박을 본인 돈 내고 자기가 사는 도시 호텔에서 자는 것)

"아니, 바로 옆에 내 집 놔두고 왜 호텔에서 자?" 파는 나름 강경하고, 
"에어컨 전기 누진세 무서워서 시원한 호텔 왔어요"~~ 이런 파는 호텔이 바로 옆집이어도 드나든다.
(사실상 누진세보다 호텔비가 더 나오는데도 ☺️)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이동한 도시가 아닌
자기가 사는 도시의 호텔 숙박에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는 어떤 심리적 장벽이 있는 듯 하다.
"대체 서울 호텔에 왜 돈을 써~?" 이런 강경파는 꼬셔도 잘 안 넘어온다. 
이와 비슷한 경우는 친척이나 친지의 집이 있을 경우 그 집에 가려하지, 호텔비는 지출하지 않으려는 경우다.
"아니, XX네 집 놔두고 왜 호텔가서 자?"


그런데 한 번만 그 "아니, 왜?" 문턱을 넘으면 중독성이 있다. 
가끔은 집보다도 편안한 곳.
한 번으로 그친 사람 드물 듯 한데....

내 집에선 청소를 내가 해야된다는... 그 의무감에서 벗어나서 좋고
'미니멀'한 삶을 살지 못해, 이것저것 끌어안고 사는 나로서는 '아무 것도 없는' 호텔방이 더 산뜻할 때가 있다. 
여러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남은 곳임에도.
내가 살던 도시가 낯설게 잠시 보이는, 초단기 여행의 효과가 있을 때도 있고.






며칠 전에 나에 대한 생일 선물로 외박(?)한 김에, 금방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서 1박을 추가했다.
THAAD 보복 여파로 중국 관광객이 크게 줄어, 요즘 서울 시내 호텔 요금이 싸다.
많은 고민 끝에.... 57,700원 정도 내고 1박 하면 이것저것 멤버십 포인트가 따라붙어 40유로(54,000원) 정도의 포인트가 더 생기는 셈이라,
손해는 안 날 것 같아서 이비스 인사동에 하루 더 숙박.
ㅎㅎ 포인트의 노예



익선동 한옥마을은 이제 북적이는 유명한 동네가 되었지만, 이 view는 여전히 좋다




이비스 인사동은 2013년 10월 개관해서 아직 만4년도 안된 호텔인데
하루 전에 2015년 3월에 개관한 호텔에 갔다가 오니, 이곳은 상대적으로 더 낡은 느낌이다.
유리창도 뿌옇고.

이번이 세번째 방문이고,
침대가 편안한 건 여전하지만 
뭔가 이것이 마지막 방문이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
오랜 정情보다 새것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크구나.



** 2019 추가; 내가 이 글을 쓴 2017년 8월만 해도, "서울 호텔에서 1박 하자--" 그러면 내켜하지 않는 친구가 많았다. 위의 호텔 비용을 나눠서 2-3만원 내자고 했는데도 우물쭈물 대답을 회피하다가 안 온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부부가 모두 연금 잘 나오는 평생 직장을 다니는데도 남편을 설득못해, 서울 호텔 휴가에 실패하고 아쉬워하던 친구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일명 '호캉스' 열풍이 시작되어 윗 내용은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 
이제는 장벽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느낌이고 대학생들도 종강 기념으로 호텔에서 쉬다가 온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으로 끝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은 확실히 유효하다. 남들 블로그를 봐도 느끼는 거지만, 한 번 간 사람은 그 뒤로 후기가 줄을 잇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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