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나는 잊었는데...

나는 내가 이런 글을 쓴 것을 까먹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기억해줬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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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스.바.협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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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matters 2007.12.18 21:40조회 68
    12월 10일 캘러니야대학교 방문.
    시내에서의 스트라이크로 개방대에서 코이카 사무소까지 1시간 넘게 걸렸는데
    콜롬보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밴에서 연기가 났어요.
    겁나서 모두 하차한 뒤, 바자지를 타고 캘러니야대학교로;;;;;;
    모두들 먼지 뒤집어쓰고 베토벤 머리를 한 채로 첫 만남.
    11시 50분에 개방대 출발해서 2시 15분쯤 캘러니야 도착했음;;;
     
    하지만 캔디가는 길에서도 구비구비 고개를 넘자마자 밴에서 연기나며 모두 하차.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아누라다가 차를 밀었지만 꿈쩍도 안했음.
    다시 모두가 바자지를 타고 earl's regency 입성. 정말 "모냥 빠지고" "없어 보였음"
     
    제가 30년 가까이 살면서 차에서 연기 나는 거 한 번도 못봤는데
    여기 와서 며칠 새에 두 번 봤어요.
     
    그냥  매상을 올리려는 <<전국 스리랑카 바자지 협회>>의 음모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바자지가 그렇게 언덕을 잘 올라갈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두 번이나 계속된 특이한 체험에 저희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답니다.
     
    이상, 음모론 좋아하는 신입이 첫 인사 드렸습니다^^




    38기 6명 감빠하,꿀리야삐띠야,캔디를 2박3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저흴 열렬히 환영해주신 단원들께 감사의 말 전하고 싶네요


     
    이름제목등록일
    ㅇㅅㄱㅎㅎ글 잼있게 쓰시네요..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잼난 일(?!)은 쭈욱 계속되겠지요~~~ 댓글쓰기07.12.18 15:07
    ㅇㅁㅎㅋㅋ 진짜 잼 나요...ㅋㅋㅋ 댓글쓰기07.12.18 16:22
    ㅈㅇㅇ와~ 이제껏 스리랑카 살면서 그런일 한번도 못겪어 봤는데 벌써 두번이나!!!! 그러네요 뭔가 음모의 냄새가~ ㅋㅋ 댓글쓰기07.12.19 03:46
    ㄱㅈㅅ움...그럼 ..37기는 어디계신거지..( '')('' ) 댓글쓰기07.12.19 11:27
    ㄹㅅㅎ하하하~진짜 잼나게 잘쓰신다~~진순이 바~~~보!! 댓글쓰기07.12.19 16:16
    구분이름제목등록일
    ㄱㅈㅅㅡㅡ+07.12.19 20:50

    행복 찾기




    "The sole cause of man's unhappiness is that he does not know how to stay quietly in his room"

    - Pascal, Pensées ,136




    내가 Pensées를 읽은 건 아니고, Alain de Botton의 The art of Travel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P.239)

    10여년 전에 처음 접한 문장이지만, 세월을 더해갈수록 이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한다.
    혼자 조용히 평온을 찾는 법을 모르는, 수많은 방황하는 사람을 봤다.

    타인의 인정없이도,
    '끊임없는 물건 사재기'와 '소셜 미디어에 관심 갈구하기'없이도,
    내 방에서 나 혼자 행복해지는 법을 아는 것.

    이거 정말 중요하다.
    외부 자극없이 스스로 행복해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서.




    Tennis ATP 250 대회에서 선수들에게 테니스 라켓 줄 매주고 받는 비용은?






    2013년 11회 대회 개최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는 Thailand open 250대회. 2014년부터는 중국 션전(深圳)으로 개최권이 넘어갔다.

    테니스 대회에서 선수들에게 테니스 라켓 줄 교체 정도는 공짜로 해주는 줄 알았는데(읭? 나 무식?), 20달러 또는 600바트를 받았다. 더불어 신용카드로도 받더라.








    2012 Thailand open에서 라켓 줄 교체해주던 방 모습 :)



    재미있는 건, 내가 받을 상금에서 스트링 교체 비용을 까달라고 하는 선수들이 많았는지
    '그런 건 불가능!'이라는 공지도 붙어있었다.




    one glance....




    난 20세기(!)에 대학교에 입학했으니, 당시에는 합격증과 함께 등록금 고지서 종이가 일일이 따라나오는 수준이었다 (21세기 대학원에 입학해보니 모든 것이 종이 한 장 없이 웹상에서 끝남). 등록금은 아마도 부모님이 이체하셨겠지만, 그 줄줄이 따라나온 납부 지로 용지들 중에 '문과대 학생회비'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이것을 반드시 내야하는 줄 알고 학교 은행에 가서 "거금" 5-6만원 정도를 직접 창구 납부했다.

    그때 갑자기 웬 남자 한 명이 그 납부 영수증을 잠깐 볼 수 없냐고 하면서 다가왔다. 역시 순진한 나는 종이를 내주었고 그 사람은 그 종이를 관찰하고 다시 돌려주고는 사라졌나...암튼 후일담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우리과의 학생회장이었던 3학년 선배였고, 나중에 더 알고 보니 총학생회비도 아니고 '문과대 학생회비' 따위를 내는 순진한 학생은 우리 반 학생 60여명 중 한 자리 수에 수렴했다. 그 사람은 아마 조악했던 문과대 학생회비 청구서와 영수증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보기 위해 은행에 죽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1학년 때 우울함에 빠져 신입생 수련회도 생략하고, 과방에도 안 가고.... 그래서 선배들을 잘 모르고, 선배들에게 별로 밥을 얻어먹지도 못했다. 나중에 2학년이 되어서야 우울함을 좀 벗고 사람들과 많이 친해지고, 3학년-4학년 때는 (이른바 '비운동권') 학과 학생회장 선거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었다. 절친과 절친한 후배가 차례로 회장으로 나섰었기 때문에... 그러면서 '내부자'가 되어보니, 의무가 아닌 문과대 학생회비 납부율은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학년 때 맘을 닫고 살아서 선배들에게 밥도 별로 얻어먹지 못한 내가 아무도 안 내는 학생회비를 혼자 내서 남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ㅎ.


    아무튼, 그렇게 멋모르고 돈을 지출하던 나에게 다가와 영수증 좀 보고 싶다고 했던 그 학생회장 오빠를 나는 별로 맘에 안 들어했던 듯하다. 문과대 학생회가 나에게 해주는 것 하나도 없는데, 돈 내지 말라고 좀 말리지.... 그리고 그 촐싹대고 가벼운 듯한 이미지...


    내가 입학하기 전해에 우리 학교는 대규모 교내 점거 시위, 그리고 교외 시위 중 학생 1명 사망의 여파가 쓸고 지나간 후였다. 지금은 취업 준비로 점철된 대학 생활이지만 그때만 해도 여전히 학교에는 NL이니 PD니 하며 정치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500명이 입학한 인문학부 학생이었지만, 입학시험 수험 번호순으로 1반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ㅎ로 시작하는 내 성씨 때문에 1반에서 밀려나와 필수 교양 수업은 4반으로 배정된 생활 속에서, 가나다순으로 같이 밀려나와 필수 교양을 듣는 1반 친구들과 그나마 친했는데 그 중 한 명이었던 여자아이 H는 그 학생회장 오빠를 따라 교내 집회 등에 열심히 참석했다. 말끝마다 "XX오빠가...., XX오빠가..."를 언급하면서...
    음, 저렇게 영향받는 친구도 있구나.


    그러던 가을, 대규모 학교 축제가 열렸고, 과 깃발을 가운데 두고 우리 과가 둥그렇게 모였다. '아웃사이더'이던 나조차도 그 행사가 궁금해 결국 참석했을 정도의 유명한 행사다. 그 학생회장 오빠가 밖에서 부터 달려와 학생들 원 한가운데 과 깃발을 쿵 찍으면서 학교 구호를 외쳤다. 그 순간 내 눈에 H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 오빠를 지켜보며 너무 기뻐하며 웃던 그 모습에서, 그 딱 표정 그거 하나에서 H가 그 오빠를 이성으로서 좋아? 연모?한다는 느낌이 확 왔다. 그전까지는 그 정도로 좋아하는지 잘 몰랐었다. 그날은 즐거운 날이라 다들 헤프게 웃고 있었지만 그애의 웃음은 달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신기한 순간이다. 뭔가가 훅 하고 흘러나왔었다. 수십 명의 과 사람들이 크게 원을 만들어서 내 반대편에 H가 서 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문과대는 원래 '여초'라서 수많은 여자애들이 서서 웃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친구의 두드러지는 '행복해 함'이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렇게 티가 나는 일이었구나....


    H본인이 나에게 짝사랑 상담을 해오지 않는 이상 뭐 내가 추궁할 수도 없고 그 사실은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겨울이 되어가던 어느 날 그 학생회장 오빠의 생일날 H가 술에 취해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오빠를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고 한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나는 H의 표정, 뭔가의 기운에서 그걸 미리 알았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학생회장 오빠는 진작에 비밀 여자친구가 있었고, 다음해 초가 되어서야 심지어 우리랑 같은 반 같은 학번이었던 여자친구를 공개했다. 그뒤 H는 마음을 어찌어찌 정리했고, 다른 동기랑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뭐 여기 얽힌 3명 모두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가끔 사람들의 기운이나 마음, 기가 공중에 훌훌 날아다니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몇몇 신기한 순간들.
    모두들 정작 중요한 것은 알지 못해 고생하지만, 그래도 어떤 '기'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도 눈치 챌 정도로 '뿜뿜'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2015/2018



    2015년 1월 18일




    2018년 1월 17일







    우연한 기회에 3년의 시간차를 두고 방문하게 된 노보텔 수원 9층.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3년 전 사진을 찾아서 비교해보니, 탁자나 의자도 그대로이고 크게 바뀐 건 없네.


    3년 전에 음식이 상당히 맛있었던 라운지로 기억하는데,
    3년 후에는 낮에 잠시 머물렀을 뿐, 음식을 먹을 기회는 없었다^^

    대신에, 2015년에는 조식과 사우나를 이용 못 해봤는데, 2018년에는 조식 뷔페와 사우나 모두 이용해볼 수 있었다.



    로베르타 빈치 은퇴



    사실 잘 알거나 응원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실제로 경기를 본 적이 있는 선수라서 몇 글자 남긴다.


    2014년 7월, 대회 막판으로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입장이 널널해진 곳을 찾아 이동하다가 보게 된 경기, 윔블던 여자 복식 8강전.






    좌측 선수가 로베르타 빈치, 우측 선수가 사라 에라니. 모두 이탈리아 선수
    2012년 롤랑 가로스 결승전 진출자인 사라 에라니가 더 유명했기 때문에
    사실 사진 찍을 당시에는 사실 로베르타 빈치는 잘 몰랐다.

    이 경기 승리 후 계속 승승장구, 이해 윔블던 복식 우승으로 이 두 명은 복식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로베르타 빈치가 단식으로 유명해진 것은 2015년 US open.
    당시 서리나 윌리엄스가 한 해가 4개 메이저 대회 모두 우승하는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노리고 있었고, 서리나는 US open 강자였기 때문에 캘린더 슬램은 유력해보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랭킹 40위권의 로베르타 빈치가 준결승에서 윌리엄스를 꺾고 메이저 결승전에 생애 최초로 진출했다. 정말 당시에 누구도 상상 못했던 대이변이었다.
    여자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대이변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테니스 경기에는 상성이란 것이 있어서...
    빈치는 결승전에서 만난 한 살 위 이탈리아 언니 플라비아 펜네타에게 패배.
    메이저 대회 준우승을 최고의 커리어로 남긴 채 2018년 35세 나이로 은퇴하게 되었다.

    어쩌면...만약에....그랬다면..... 이런 가정은 모두 무의미하지만
    플라비아 펜네타는 서리나 윌리엄스에게 매우 약해서 7전 7패의 상대전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빈치가 윌리엄스를 꺾어준 덕분에 상대적으로 쉬워진 결승전에서 펜네타가 빈치를 꺾고 생애 유일의 메이저 트로피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리고는 깔끔하게 트로피 받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은퇴 선언.
    현재는 이탈리아 테니스 선수와 결혼해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20살에 첫 우승을 하는 게 아니라, 산전수전을 다 겪은 뒤 30대 전후해서 메이저 첫 우승을 하게 되면 곧바로 은퇴를 하는 여자 선수가 종종 있었다. 각종 부상으로 선수 생활이 고생스럽고 전세계 투어로 정착이 힘든데, 늦은 나이에 정점에 오르게 되면 아마 앞으로 이보다 더 좋은 날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정상에서 은퇴를 택하는 것 같다. 32세에 첫 메이저 결승에 올랐던 빈치가 그때 우승을 했더라면 일찍 은퇴한 것은 빈치이고 오히려 펜네타가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을지도....


    위쪽에 더 작게 나온 선수가 플라비아 펜네타, 통산 582승을 기록하고 은퇴한 훌륭한 선수이다.



    테니스 대회를 보다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선수 한 명이 파죽지세로 8강 4강에서 강적들을 다 정리하고 올라와서
    정작 결승에서는 패배하는....
    토너먼트 대회의 어떤 특징이기도 하다. 강적이 몰려있는 draw에 속해서 개고생(?)하며 무적의 포스를 보이다가
    상대편 draw에서 올라온 선수랑 붙어보니 그냥 싱겁게 패하기도 하는...
    강적들을 상대하느라 힘을 많이 쓰기 때문에 결승전이 오히려 무기력하게 끝나버리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역사에는 우승자의 이름만 남는다.
    이래서 조 편성 운이 상당히 중요하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에 내가 빈치를 더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본인은 후회없이 아름답게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 헌정 영상에 veni vi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에서 착안한
    "veni vidi Vinci"를 남기고.


    이탈리아어로 우승자는 "VINCItore"이다.










    저 멀리 보이는 경기중인 선수 이름이 새겨진 전광판과 파란 하늘 :)
    관람 당시 하도 많은 경기가 벌어져, 내가 무슨 경기를 보았는지 기억하기 위해 전광판 사진을 찍어놓곤 했다.
    내가 이렇게 상대편 관중석을 찍어서 사진이 남았으면, 저쪽 반대편 누군가가 찍은 사진 속에도 내가 남아있겠지. 📷😂


    다름 2




    겨울에 이란 사람들이랑 잠시 일했었고
    그들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텔레그램에 새로 가입했었다.
    왓츠앱을 주로 쓰는 보통 외국 사람들과는 달리, 이란에서는 텔레그램이 압도적이라고 했다. (이란에서만 무려 4천만 명이 사용중!)


    텔레그램에 가입하고 보니,
    이미 나의 한국 친구 중에도 은근히 사용하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종종 텔레그램을 이용하곤 했는데, 카카오톡과 다른 텔레그램의 특징은 상대방의 최종 접속 시간이 자세히도 뜬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중년 이란 아저씨들은 쉴새없이 텔레그램을 이용했고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에 최종 접속 시간이 안 나와서 그렇지, 카카오톡에도 최종 접속 시간이 표시된다면 한국 사람들도 누구나 이렇게 뻔질나게 접속하고 있는 게 보이겠지 싶었다.

    한동안 텔레그램을 접속 잘 안 하다가 오랜 만에 접속해보았다.
    친구들 목록이 주르륵 뜨는데, 이란 아저씨들이 거의 일주일 가까이 접속을 하지 않고 있는 게 보였다. '오잉? 웬일일까? 5분이 멀다하고 접속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잠시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고.... 안부가 궁금했다. '해외 출장이 잦은 직업의 사람들이니, 해외에 갔나? 아니 그래도 와이파이만 되면 메신저는 접속할 텐데??'



    뉴스를 검색해보니, 이란 사법부가 텔레그램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단다. 反정부 시위 등의 정보가 텔레그램을 통해 전달된다며.... 자국산 메신저를 이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허허.
    (페이스북 등은 원래부터 금지, 다들 vpn을 통해 우회해서 이용한다고는 한다. 특이하게 인스타그램은 허용되어 있다고 한다. 이란 최고지도자들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의견을 발표한다. 어차피 인스타그램도 페이스북에 인수된 회사인데🤔)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사람까지는 익숙했지만
    이른바 '중동' 친구는 이번 겨울에 알게 된 것이 처음이었고 처음에는 겁(?)도 났다.
    '친구'말고 처음으로 봤던 이란 남자가 2007년 방콕 공항버스 옆에 타서 치근덕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편견이 있었다.

    하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 결국 다 같은 사람들이었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새로운...
    2주 만에 교류는 끝났지만 부쩍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새로운 세상과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랬지만...
    사법부의 결정으로 국민 대다수가 쓰던 메신저를 한 방에 차단하고 통제할 수 있는 나라라니....
    아무리 '다름'을 존중한다고 해도,
    다시금 멀게 느껴진다.


    트럼프의 이란 핵협정 파기니 뭐니 다른 뉴스들도 시끄럽지만, 어쩌면 '북한'을 맞대고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핵 뉴스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인 반면에 당장 내가 쓰던 메신저를 나라에서 차단할 수도 있다?? 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먼 얘기같다. 중국처럼 애초에 차단한지 오래 되어서 대안적인 앱이 발달한 나라도 아니고, 4천만 명이 쓰던 메신저를 한 번에 차단하다니.


    처음에는 생소함에 겁도 났었던 그들과
    며칠간 늘 같은 차를 타고 다니고 같은 건물에 살고 했던 것이
    이 '지구촌' 사회에서는 늘 일어나는 그냥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국가의 메신저 금지 소식을 들으니, 이상하게 다시금 거리감이 느껴진다.
    내가 다시 연락하기도 힘든 나라의 사람들과 만났었구나...하는 묘한 느낌.
    그분들은 지금 얼마나 갑갑할까...










    무위도식의 결과물





    이번 달 말이면
    사용한 지 무려 만 7년을 맞이하는 아이패드2.

    워낙 잘 만들어진 모델로, 나처럼 아직 사용한다는 분도 종종 보지만
    그래도 꾸준한 소득이 있었다면 새로운 기종으로 업그레이드했겠지.

    2015년까지는 그래도 속도에 문제없어서 모든 해외여행까지 함께 했으나...
    2017년부터는 속도도 너무 느리고 3G도 잘 잡히지 않아서 3G 서비스도 탈퇴하고 
    집에 모셔놓고 와이파이용으로만 쓴다. 영화도 보고.

    아직까지는 그래도 잘 버틴다 싶었는데
    만 7년을 앞두고 앱 실행이 잘 안 되고, 맘대로 꺼졌다 켜지곤 한다.
    영상 재생도 잘 안 되고...

    슬슬 보내줄 준비를 해야하는 건가.
    갑자기 어떤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어의 세계



    아부기다

    [Abugida]
    요약 👉 자음과 모음을 포함한 기호가 하나의 단위 음절을 이루는 문자 표기 체계.
    자음과 내재 모음을 하나의 단위로 표기[consonant-vowel(CVsyllables]하는 문자 체계로, 언어학자 대니얼스(Peter T. Daniels)가 에티오피아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하였을 때 나오는 첫 네 글자'አ(아), ቡ(부), ጊ(기), ዳ(다)'(영어 알파벳으로는 A, B, C, D에 해당)를 따서 명명하였다.

    음절문자·음소문자와 더불어 표음문자로 분류된다.
    아부기다는 인도에서 발전한 후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는데, 그 모체가 브라흐미 문자이다. 오늘날에도 남아시아와 대륙부 동남아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사용하는 에티오피아 문자도 아부기다 체계를 따른다. (두산백과)


    (싱할러 문자를 프린팅한 접시)


     ------> 🇱🇰스리랑카 싱할러 문자와  넓게는 🇹🇭태국어 문자가 여기에 포함.
    위 접시에 나온 문자 중 맨왼쪽 세로줄을 읽으면 "아 우 카 따 야 라"이다.

    스리랑카어를 배운 상태에서 태국에 2주 가까이 체류할 일이 있었다. 태국 문자를 하나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관찰해봐도 스리랑카 문자의 구성 방법(=아부기다, 당시에는 '아부기다'라는 말을 몰랐지만)과 태국 문자가 같을 것 같아서, 같은 방식 아니냐고 물었더니 태국 친구는 아니라고 단호히 대답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의사 소통이 원활치 않아서 그랬던 듯.😉  그  태국친구는 '스리랑카어는 인도아리아어족이고, 태국어는 따이까다이어족이다', 이런 식의 차이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스리랑카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면, 아부기다 설명[자음과 내재 모음을 하나의 단위로 표기하는 문자 체계]을 보고 이게 뭔 소리인가 했을 것 같다. 아부기다 체계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문자 체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감이 온다. 





    아브자드




    페니키아 자음 문자의 첫 다섯 글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음문자(子音文字, consonantary) 또는 아브자드(abjad)는 음소 문자로 구성된 문자 시스템의 하나로, 자음(子音)의 음소마다 한개의 문자(음소문자)를 갖는다. 각 기호가 일반적으로나 늘 닿소리를 표현하는 데 쓰인다.[1] 통상 자음만을 문자로 표기하며, 모음을 표기 하지 않는 점에서, 알파벳과 같은 자모 문자와 구별된다. 아브자드는 모음의 음은 자음의 배치와 문장에서의 위치에 따른 음운론적인 암시 형태로 나타내며, 니쿠드(히브리 문자) 혹은 샤크르(아랍 문자)과 같은 모음 기호가 별도로 존재하나, 반드시 문서에서 표기해야 하는 규칙이 없다는 점에서 아부기다와도 구별된다.
    '아브자드'는 '아부기다'와 더불어, 미국의 언어학자 피터 T 다니엘스가 제안한 용어이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 최초의 아브자드는 위 그림에 나온 페니키아 문자라서, 알파벳보다 역사가 길다고 한다. 아랍문자, 히브리문자 등이 아브자드에 속함. 위에 나온 것처럼 모음의 음이 "음운론적인 암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습으로 혼자 익히면, 아브자드 문자는 다 파악하더라도 글을 제대로 읽기는 어려운 특성이 있다. 당연히, 체계적으로 익히면 어떻게 읽어야할지 규칙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아랍어로 테니스는 تنس 이고 페르시아어로는 تنیس인데 사실상 'ㅌㄴㅅ' 'ㅌ니ㅅ'라고 써 있는 식이어서, 자습으로 이 언어를 익혀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어찌 읽어야할지 좌절감을 안겨준다. 토니소? 타니시? 티노사? 

    덜기




    메인 요리가 나오면 다분히 '한국적'인 상황은,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을 위해 그 음식을 덜어 앞접시에 놓아드리는 것이다. 특히 대형 냄비에 끓이는 탕, 찌개 요리가 많은 우리 나라에서는 식탁에 잘못 앉았다가 '막내'가 되면 모든 사람들의 국을 다 퍼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행위인데, 다들 각자 알아서 원하는 대로 자기서 퍼서 먹었으면 좋겠고, 내 것도 누가 해주면 불편하고, 솔직히 어른들 것 해드리기도 싫다. (그래도 사회 생활하면 허허허 웃으면서 한다). 거동이 불편한 노년층은 물론 기꺼이 해드릴 수 있다.

    그리고 나이 순서대로 음식을 퍼야되는 것도 웃기다. 뭐 그냥 시계 방향, 반시계 방향 이 정도면 되는 거지.... 하지만 이런 문화는 나 혼자 바꾸기도 어렵고, 혼자 바꾸다가는 그저 버릇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다.


    오늘 어버이날을 앞두고 가족 식사를 하는데
    커다란 접시에 담긴 샐러드가 가장 먼저 나왔다.
    참석한 가족 중 가장 어린 올케(남동생 부인)가 샐러드를 퍼서 엄마에게 담아드리기 시작한다.

    '아휴...저럴 필요 없는데. 내 건 내가 담아먹어야지.'라고 안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 남동생이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먹죠.'라고 거든다. 자기 부인 고생할까 싶어 늘 솔선수범인 남동생. 여전히 애처가구나 싶다.

    이런 말이 나올 필요도 없이 제발 자기 음식은 자기가 알아서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회사 다닐 때 또 하나 싫었던 한국(?) 문화는
    내가 갑자기 믹스 커피가 땡겨, 타먹으러 잠시 자리를 비울 때 꼭 옆사람에게 "언니도 혹시 커피 마실래요?" 라고 예의상 말하고 가야 하는 것. 아무 말없이 혼자 마실 커피만 가지고 오면 싸가지 없는 사람 된다. 이유를 모르겠다.


    삼촌과 십대 조카가 나오는 미국 영화를 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나다가 조카가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삼촌 돈 좀 줘."라고 한다. 잠시 뒤, 혼자 가게에 들어갔던 조카는 아이스크림 한 개를 입에 물고 나온다. 그리고 삼촌과 조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던 길을 간다.

    한국이었으면 얼마나 부차적인 상황이 더 붙어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삼촌도 드실래요?" 라는 질문은 꼭 들어가야 했을 거고, 질문 없이 조카가 달랑 하나를 사서 나오면 삼촌이 "야, 내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마디 물어보지도 않냐?"라는 대사가 꼭 들어갔을 법하다. "혼자 먹으면 맛있냐?"라는 핀잔과 함께. 이런 상황에 내가 너무 젖어 있어서, 나조차도 그 영화를 보다가 처음엔 '어? 삼촌 돈 받아서 딱 자기 것만 먹네?' 라고 생각하다가 흠칫 놀랐던 기억이 있다.


    뭐 괜히 외국 문화 우대하고, 한국 문화 깎아내리자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개인 성향이다.
    어떤 것은 한국 문화가 더 좋고 외국 문화가 싫을 수도 있다.





    lost







    멕시코 몬테레이 거리에서 구입해서 추억이 담긴 팔찌인데...

    http://mori-masa.blogspot.kr/2015/11/blog-post_69.html



    그냥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신축성있는 줄로 연결되어 있어서
    잃어버릴까봐 잘 안 하고 다녔는데..

    오늘 보니 부엉이 부리 아래 하늘색 보석(?) 하나가 이미 사라졌네.





    끊어질 우려가 없는 줄을 구할 수 있으려나??
    가끔은 하고 다니고 싶은데.




    카카오톡 연대기



    나는 카카오톡을 2011년에 시작했으니, 이제 8년차다.
    그동안 나의 신변에는 변화가 하나도 없었는데,
    지인들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변천사를 보면 그들의 인생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카카오톡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이 인생의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어느날 연인들과 함께 한 사진이 등장하다가, 갑자기 턱시도와 웨딩 드레스 또는 한복을 입은 사진으로 바뀌면 청첩장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결혼 초기 여기저기 놀러다니며 부부 둘이 찍은 사진이 등장하다가, 어느날 D-29 같은 숫자와 함께 초음파/만삭 사진이 등장하고, 그 다음 수년간은 사진이 98% 통일된다. 자녀 사진.

    여자 지인의 카톡 대화명은 자녀의 성장에 따라 자녀의 등교가 시작되면 하나씩 둘씩 바뀌기 시작한다."길동맘"  "신사임당(율곡맘)". 둘째도 등교가 시작 되면 이름이 추가된다. "길동-귀동맘".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서의 구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맞벌이를 하더라도 육아는 엄마 담당이기에, 남자 지인의 대화명이 "이원수(율곡파)" "길동-귀동파파"  로 바뀌는 것은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받은 상장 사진이나 영어유치원 다니는 자녀가 영어로 삐뚤빼뚤 쓴 편지가 등장한다. 아직 내 친구의 자녀들은 중학생 정도인 것이 최고령(?)이지만 언젠가 자녀가 서울대라도 진학하면 서울대 정문 사진을 떡 하니 본인 프로필 사진에 넣는 부모도 있다고 들었다 😂


    너무 예쁜 내 새끼, 내 아이의 사진으로 채우기도 바쁜 카톡 프로필 사진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도 부부 사진을 본인 프로필 사진에 넣는 부부가 있을까 궁금하다.
    나이가 드는 것을 거스를 수 없듯이, 카톡 프로필 사진의 변화도 거스를 수가 없었다. 모든 친구들이 연인 -> 부부 -> 자녀 사진 순서로 이동.
    가끔 가족사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가족 모두 같이 "해외"여행을 다녀왔을 때이다. :) 신기하게도 국내여행을 다녀오면 여전히 여행지를 배경으로 한 자녀 사진이 프로필이지만, 해외여행을 가면 얼마동안이나마 배우자의 얼굴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나에게 소중했던 순간, 남들이 좀 봐주었으면 좋겠는 것들, 이것이 '나'임을 나타내는 사진을 등록하게 된다. 자식은 내 몸에서 나온 '분신'이기에 자녀의 사진이 곧 내 사진이지만, 험난한 파고를 같이 넘고 볼꼴 못볼꼴 다 보며 십여 년을 살아낸 뒤에도 여전히 내 남편 내 아내의 얼굴이 가장 자랑하고픈 대상이라면, 그건 진정 '낭만적'인 일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같이 경험없는 미혼자 입장에서는 (순진하긴 ^^). 

    내 자식은 내 몸에서 나온 내 사람이기에 어떤 짓을 해도 결국은 이뻐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자랑하고픈 또다른 나. 그 존재의 결점까지도 나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고 언제나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이질적이었던 한 인간과 같이 살면서 오랜 세월 단점을 보고 난 뒤에도 그 배우자를 내 사람(such as "Call me by your name, I'll call you by mine") 으로 기꺼이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큰 행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녀와의 만남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 "아무 것도 아닌 나에게 이렇게 소중한 자식이 태어나서 그 존재가 나를 의지하고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준다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 이것 역시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이다.


    친구들 목록을 주르륵 살펴보니
    한창 육아중인데도 자녀 사진이 아니라 신혼 때처럼 부부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쓰는 또래 친구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남편/아내를 포함한 "가족"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만든 딱 두 명이 눈에 띈다.
    그런데 그 두 명은 각각 프랑스인, 인도네시아인과 결혼한 친구라는 점.

    프랑스인과 결혼한 친구가, 자녀 중심인 한국 가정보다는 프랑스는 좀 더 부부 중심의 가족 관계라고 하더니 (두 돌 안 된 아기도 부모와 다른 방에 재우던 그 친구집에 직접 가본 적 있다) 실제로 그게 프로필 사진에도 나타나는 경우였나보다.


    ("관찰"한 소감을 적은 것이지, "가치 판단" 느낌은 안 주려고 노력했는데
    혹시라도 자녀 사진이 카톡 프로필이신 분이 읽었다가 기분 나빠질 소지가 있는 글인지 걱정된다. 이럴 때면 그래도 두어 명의 친구가 솔직한 감상을 적은 댓글을 달아주던 싸이월드 블로그 시절이 그립다.)




    당신도 이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홍콩 / 심천 국경에서 중국 비자 받기

      서울에서 중국 관광 비자 받는 과정이 무척 귀찮아졌다. 온라인에서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참 동안 비자 신청서를 완성하고 비자 접수 날짜를 예약하려 하니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보름에 가까운 여유 시간이 필요해서 나의 출국 날짜에 하루 정도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