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피아노협주곡 G장조 2악장






영화 'biutiful'이 끝나가며 들리는 음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를 위해 작곡된 곡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찬찬히 들어보니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깔려서 피아노 협주곡일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정보를 좀 더 찾아보니 그 음악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 2악장으로
애초에 영화도 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피아노 협주곡 2악장에 아름다운 선율이 많다.


영화 마지막 부분 분위기와 어울림.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 특유의 "뭐 이럴 것 까지야...??" 라는 장면이 난무하는
중간부분은 맘에 안 들지만
영화의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조화가 아름다워서 기억할만한 작품.







Cornell univ. Ithaca 2006






유학 중인 친구 덕에 방문했던 코넬대학교.
뉴욕 맨해튼에서 버스로 5-6시간 걸리는 외진 도시, Ithaca에 위치.
호수와 폭포를 끼고 있는 광활하고 아름다운 캠퍼스, 3월임에도 여전히 겨울이라 약간 쓸쓸해보이긴 했다.

1-2주 정도 머무르면서
유학 생활을 마무리중이었던 친구와 아주 가끔 캠퍼스에 나가곤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끔 학교 한 켠에 있던 seattle's best coffee의 한적한 매장에서 아마도 핫초코? 마시던 때, 그 카페의 풍경이 스멀스멀 스쳐간다.
커피샵 브랜드도, 마셨던 음료 종류도, 확실치는 않지만 (기억은 왜곡되는 거라서)
당시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그 하루 그 찰나 그 장면이 종종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지금 다시 구글링을 해보면 seattle's best coffee는 이제 코넬대 안에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미 12년 가까이 지났으니...

종종 떠오르는 그 풍경이 확실한가 싶어서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커피샵도 사라져서 다시 찾을 수 없을 듯 하고, 
미국에 다시 갈 일이 있더라도 코넬대 같이 외진 곳에 다시 갈 일이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때 나를 기꺼이 1주 이상 재워줬던 친구와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억의 한 구석에
그 장면이 늘 남아있는 것은 신기하다.



늦겨울 황량한 코넬대 배경으로 깨알같은 나



'말로 하지 않아도 의중을 알아챌 수 있다'

 


정말 친한 관계를 나타낼 때 꼭 쓰는 말.
표정만 봐도 안다. 눈빛만 봐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안다고 생각하다가
넘겨짚어서 오판, 오독할 가능성은 없을까?
 
친한 사이의 함정.
친하다가 안 친해지는 어떤 이유 중의 하나.


표정만 봐도 알아서. 눈빛만 봐도 알아서.

 
 
 
 
 
 

과거

 

    등록일시 2013.12.22 02:17




요즘 보니, XXX 해외 봉사단원 모집 TV광고도 하더라....
광고를 보면서 처음에는 약간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광고 화면에서처럼 유니폼을 입고 활동하는 것은 2년 중에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거다. 보통은 촬영용으로만 유니폼을 입게 만들었던 것 같다.
크나큰 결심을 하고 부임지에 도착하지만 예상했던 생활 수준보다 의외로 잘 사는 나라도 많고, 그래서 유혹도 많다.


나도 내가 해야 하는 일에는 충실했지만, 일을 만들어서 하지는 않았다.
잦은 휴교 탓에 실제 출근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빈둥빈둥 보낸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그게 찔려서 귀국 마지막달에 정규 과정에 없는 소규모 보충 클래스를 만들어 몇 명 가르쳤던 게 유일하게 내가 추가로 한 일이었다고나할까. 그 2시간 보충 수업을 듣기 위해 왕복하면 4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버스 타고 학교로 찾아오던 학생의 그 열정에 비해, 난 형편없는 선생이었다.



하지만 그 광고를 보던 말미에는 그래도 뭉클해졌다.
뭐라해도 그 2년은 내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 2년이었다.
대책없이 게을렀지만 그래도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는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요즘도 가끔 "선생님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영원히 기억해요, 선생님" "5급 합격하고 선생님 생각났어요." 같은 과분한 문자를 받으면 잠시 힘든 세상이 멈추는 듯 하다.
내가 그들에게 더 고맙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는 내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거, 상당히 위안이 되는 기억이다.
      





영화 The hours

have to face the hours....

 
 
Richard Brown:
"But I still have to face the hours, don't I?
I mean, 
the hours after the party, and the hours after that... "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이 왠지 싫다.
혹은 언젠가의 그 무엇을 위해 기다려야 되는 시간들..
언제쯤 희망에 부풀어 앞날을 내다 볼 수 있을까?
 

신데렐라

 


아주 오래된 서랍 정리를 하니
거의 30년 역사를 바라보는 유물이 발굴된다.


       


이거 보는 순간 바로 기억났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마론인형'이라고 부르던 친구가 신고 있던 신발.

나는 뭔가 사달라고 조르는 타입의 아이는 아니었는데, 이 인형만은 언니와 함께 부모님을 졸라서 타낸 걸로 기억한다. 내 인형은 하얀 레이스 드레스 위로 빨간 코트같은 드레스를 한 겹 더 입고 있었던 인형. 언니 인형은 분홍색 드레스.
인형은 어디로 갔는지
언제까지 날 따라다니다가 버려졌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래도
신발 한 짝은 남겨놓고 갔구나.




  • ㅋㅋ 웃기다. 난 많고 많은 마론인형들 다 사촌동생 주고 제일 맘에 들었던 한명은 아직도 갖고 있다는 ㅎㅎ
    2013/12/21 00:35
           
  • 와, 아직? ㅎㅎ 나 인형에 애착이 많은 편인데... 아마 나 랑카갈 때 집도 이사하면서 싹 쓸어다버리신 듯 ... 역시 이별 장면을 모르면 이별이 수월한 거 같아 ㅋㅋ





세상의 경계에서...




'bucket list'라는 영화 제목은 개봉 이후에
이 단어가 인간의 필수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유행했지만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영화 속 장면은 그 bucket list 실행에 대한 것이 아닌, 아래 장면이다.


이집트로 여행 가서 피라미드를 보면서 두 주인공이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뒤 천국의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리고






"너는 삶에서 joy를 찾았느냐?
너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joy를 주었느냐?"


(여기서 joy는 기쁨, 즐거움, 행복... 어느 한 단어에 담기보다 더 큰 의미라고 생각해서 joy로 남겨뒀다)


대부분은 두번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려워 고민이 많이 될 것 같다.
어떻게든 내 인생의 joy를 찾을 수는 있지만 내 삶이 남에게 joy를 가져다 주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을 테니까.


어제,
늘 남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사람이었던 젊은 가수가
본인의 joy를 찾지 못해 괴로워해오다가....스스로 죽음을 택해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너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는 법을 깨달았느냐?
너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느냐?"



수많은 팬들이 yes!!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두번째 질문의 답이 쉬웠는데
(본인은 yes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no였던 경우.
이런 경우도 있구나.
'타인의 삶'이 얼마나 알기 어려운 심연인지 새삼 더 느껴진다.


보통 우울한 사람은 1번, 2번에 모두 답이 안 나오는 경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1번이 yes여야 2번이 yes가 될 것 같은데,
2번 답에 무조건 yes가 나올 만한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1번 답을 못 찾아 고통을 겪는.....

주위 사람들...다들 손 내밀어주고 싶었겠지만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라 너무 힘들었던 그 싸움.
그런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나이가 너무 어려, 그를 만난 적도 없는 나조차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는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한....


그래서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성취했느냐보다 더 중요했던 그 질문,

"Have you found joy in your life?"


나는 내 인생에서 어느 한 순간,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고,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는데도
혼자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인생이 감사하고  joy가 넘쳐흘렀던 경험을 기억한다.
'무엇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그냥' 살아서 행복했던 날들.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이 경험을 해봤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중국계 미국인 교수가 "congratulations!"라고 말해줬던 것을 기억한다.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게서는 나오지 않던 반응.


부모들은, 내가 낳은 자식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 외에...
미국 교수가 저렇게 축하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그저 네 인생 앞날의 부침과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들 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미취학 연령'일 때는 "그저 건강하면 돼." "난 사교육 관심없어."  "난 그저 무조건 지지만 해줄 거야." 하다가 결국 '취학 연령'이 되어 레이스가 시작되면 동시에 다들 어쩔 수 없이 내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봤다. 물론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이런 성취와 경쟁 중심 사회에서, "아빠/엄마, 저 어느 날 길을 걷다가 알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느꼈어요" 이런 말을 털어놓을 수라도 있는 부모-자식 관계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저 말을 듣고는 기뻐할 순 있더라도 다른 조바심이 날 것 같다. '그래도 대학은 좋은 데 가야 니 인생이 더 수월해질 텐데...' '좋은 직장 다니고 돈 버는 재미 알면 지금보다 백배천배 더 행복할걸?' '좋은 짝을 만나야 훨씬 더......'

그래도 태어나서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joy를 찾고, 그것을 나눠줄 수 있는 삶으로 끌어가는 것,
그리고, 밝고 태연한 사람이 속으로는 망가져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공감 능력 키우는 것.










*** 한 가지,
내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 점이지만.....

내가 위에서 말한 '아무 계기없이 그냥 행복했던 상태'를 겪었던 시기는
아주 낮은 노동 강도로 일을 하는 와중에 상대적으로 괜찮은 생활비가 입급되고 있었던 시기라는 것을 밝힌다.(단기간)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24시간 돈벌이에 시달리는데 '그저 행복함'을 느끼기란 매우 어렵다.
한때는 내가 스스로 행복을 찾은 것 같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왔는데, 잘 생각해보니 행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보다는 [경쟁이 적은 일터에서의 불로소득에 가까운 실소득]이 그 행복감을 꽤나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sergio castellitto



최근에 본 이탈리아 영화 '웨딩 디렉터'와 '사랑해, 파리'에서 잇달아 만난 이탈리아 배우.
윗 사진은 영화 'Non ti muovere'에서 기억에 남은 장면.

53세의 나이로, 그의 얼굴은 피곤하고 삶에 찌들었지만 뭔가 꿈꾸는 중년 역할을 하기에 딱이다.

무엇보다 '웨딩 디렉터'에서 구애를 위해 여자의 집 창가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던 게 인상적이었다. 립싱크 같지 않고 라이브 같던데...진짜 본인의 목소리라면 노래도 정말 잘 하더라. ('지대로' Romantic한 이탈리아 남자의 특성을 그대로 구현함. 그러고선 그 여자네집 집사한테 물 한바가지 얻어맞는 것도 왠지 이탈리아 이미지)

그 아리아를 대부3 ost에서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제목을 알아내고
난생 처음 오페라 씨디를 샀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원래 간주곡이 더 유명한 오페라인데 멋진 아리아도 숨어있었다.

최근에 만난 H모양은 자신은 너무 영화 속 소설 속 멋진 인물 아니면, 현실에서도 연애가 불가능한 인물에 자신이 매력을 투사해서 좋아하는게 문제라고 했다.

나는 이런 인물 자체에 매료되는게 아니라, 이런 인물이 구현하는 어떤 이미지를 좋아한다.  

내가 관심있는 이야기는




내가 관심있는 이야기는
너는 관심이 없고,


네가 관심있는 이야기는
내가 관심이 없다.


너도 내 사정을 이해 못하고
나도 네 사정을 이해 못한다.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다 잘 들어맞게 맞장구쳐주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건 나도 못 해주니까.

재미없다.
모든 게 재미없다.







어느해 3월....






-------의식의 흐름 형태로 내용이 뒤죽박죽이다


17일

"뭔가 겉도는 느낌과 알 수 없는 표정들에 갑갑했다.
난 나중에 "Kurtz"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18일


"자꾸 [Heart of Darkness] 생각이 난다.
모르는 새에 환율이 많이 올랐더군.
어제가 불쾌했던 이유는 수많은 거짓말이 난무하는
꼴을 봤기 때문일 거다. 아....
그렇구나, 문제는 자신의 power에 대한
과대망상이 생긴다는 거다. 5년 있었던
사람이나 마찬가지.
낮추고 낮추기."







사극 말투?




그리스나 로마 등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 영화/드라마 속에서 미국 배우들이 영국식? 혹은 고전식? 말투를 쓰는 것이 늘 신기했다.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이 그 나라 말을 했지, 어차피 영국식 영어를 쓰지는 않았을텐데... 그냥 편하게 미국식 억양을 쓰면 안 되는 건가?


어차피 완벽히 고증이 안 되는 거면 편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오히려 현재의 미국 억양이 현대 영국 영어보다 더 "올드"한 억양인데 그냥 미국식 영어를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현대의 미국 영어가 200여년 전 영국에서 건너간 영어와 오히려 더 가깝다. 영국 영어 발음은 그 이후로 변화를 거침)


그런데 우리 나라 사극의 경우를 보아도, 아마 그런 말투는 그냥 그저 '사극은 사극이어야' 하기 때문에 쓰는 말투인 것 같다. 고증이나 유사성의 문제는 둘째 문제고.

많은 남자 배우들이 사극만 맡으면 목과 배에 힘을 주고 쩌렁쩌렁한 소리를 낸다 "즈어언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사옵니다"

????

옛날 사람들은 말을 다 그렇게 했다는 말인가? 지금보다 영양 상태도 훨씬 안 좋았을텐데, 맨날 목 아프게 성대를 긁어가며 말했을까?
"~~ 사옵니다"  "그렇소" "하시오" 뭐 이와 비슷한 말투는 백제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을 망라해서 다 나오는데, 진짜 우리 선조들이 이런 말을 썼는지도 확실치가 않다.
그냥 사극은 사극이어야 되니까 쓰는 말 같다.


가끔 연배 있는 배우들이 신인배우를 두고 "걔는 아직 사극 발성이 안 돼. 더 연습해야 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이 발음하는 법은 같았을 것 같은데 사극은 다른 발성을 해야 된다는 설정도 사실 이상하다.



"토옹초옥하여주시옵소서~~~~~"
(목 아파)




등록일시






먼치 특별전







2006년 3월 MoMA에 갔을 때 'Munch'특별전 대대적인 광고와 함께
아래 그림과 비스무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그림을 흉내내 그리는 '패러디 화가 먼치'라고 생각했다.
볼이 미어터질 정도로 뚱뚱한 모나리자..이런 식으로 명화들을 재해석하는 화가 그림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입장료가 20달러인 MoMA에 오후 4시에 공짜로 들어간 뒤
다시 5시 45분까지 구겐하임에 가서 입장료를 쪼금 내고 들어갈
생각 밖에 없었던 나는 '먼치' 특별전을 그냥 대충 보고 나왔다.


눈에 확 들어오는 '먼치'의 그림 하나가 있긴 했지만
급한 마음에 빨리 빠져나와서 구겐하임으로 갔다.



저런 화풍의 그림 전시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Munch는 뭉크 전시회 였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무식이 탄로났다.

그래도 그 여행을 계기로 미술관이 좋아졌다.  




  • ㅅㅎㅈ 
           
    ㅋㅋㅋㅋ 웃겨죽겠다...ㅋㅋ
    2006/12/15 03:42






김동률 [귀향]









2001년 10월 발표된 곡.
16년이 지났는데, 이제야 가사의 의미와 함께 새삼 와닿는다.
요즘 자주 머리 속에서 들린다.


실제로
내가 너무 그리워하는 곳에 비행기가 서서히 착륙할 때, 그렇게 "귀향"할 때 들으면 
정말 어울릴 것 같은 곡이다.
기내 창문 너머로 늘 그리워하던 그 땅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이 음악을 들으면
눈물이 주르륵 흐를 것 같다.


예전에 베트남항공을 타고 하노이에 간 적이 있다.
이코노미석 가장 앞쪽 창가에 앉았는데
가운데 벽 베시넷 때문에 내 옆에는 아기를 안고 고향 방문하는 베트남 엄마들로 가득했다.
다문화가정이라 해도, 자녀에게는 말그대로의 "母국어"를 먼저 가르치면 더 좋다던데ㅠ, 주위 눈치 때문인지 어색한 한국어(父국어?)로 아기들을 달래던 어린 베트남 엄마들.....  

착륙하던 무렵에....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막 어르고 달래면서도
계속 고향땅 조금이라도 먼저 보려고 창쪽으로 눈을 떼지 못하던 아기 엄마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기 때문에 곤란해하면서도 그 환한 표정.


그 심정을 이제 알 것 같다.







놓칠 수 없는 이야기





내 인생에 가장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한 해인 2008년 일기장을 정말 오랜만에 찾아냈다.
사실 예전 일기장을 자주 읽어보는 편인데
2008년 것은 어딘가에 묻혀있어서 그동안 보지 못했어서...내용이 새롭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내용




3월 27일 中에서


"진짜 요상한 소리를 내며 짖던 멀리 있는 개(බල්ලා).
혼자만, 남들이 모르는 뭔가를 알아냈거나
아니면 정말 미쳤거나, 둘 중 하나다."






4월 8일 中에서


"저 앞집 미친개 좀 어떻게 말렸으면 좋겠삼.
선구자인지, 미친개인지"






이웃에서 미친 것 같은 개가 요상한 소리로 짖어댔다는 사실은 신기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쩌면 그 개가 선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 역시 절대 기억 속에 없다. 내가 기억력이 좋다고 생각해온 것도 나의 착각이었던 듯.


앞집 개뿐만 아니라, 내가 세들어 살던 집에도 집주인이 남겨두고 간 닥스훈트 두 마리가 있었는데, 이들이 나를 볼 때마다 짖어서 이들과 대치하느라 내 집 드나들기도 무서워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 개들이 나를 보고 짖지 않게 되기까지 7주 넘게 걸렸다고 적혀있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며 매일매일 새로운 위기를 넘던 한 해라서,
일기가 재밌어서
읽기가 아까울 정도다.
쓸데없이 영어 남발하는 거 싫어하는데....struggle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1년.


보통 오랜만에 예전 일기를 발굴(?)하면 단시간 안에 1년치를 다 읽어버리는데,
요건 너무 재미있어서 야금야금 읽어야겠다.

















묘연




어떤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에 길냥이를 우연히 데려와서 키우는 이야기가 나오면 '어머, 묘연이 있나봐요.' '묘연이 있는 것이니, 잘 키워보세요.' 같은 댓글이 달린다.

나 역시 사람 사이의 연이 아닌 고양이와의 연이니, '묘연'일거라 쉽게 생각했는데. 단어를 찾아보니 인연에서 '인'은 사람 人을 쓰지 않는다.
因緣이더라.


한 달 전 결혼식을 해서 이제 우리 가족이 된 '올케'(아직 어색한 명칭이지만)는 집에서 고양이를 키웠었다. 내 남동생이 처음 그녀를 소개할 때 한 말이"누나와 공통점도 있어. 얘도 고양이 키워."라고 했었다.

올케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 다녀오고, 독립해서 새 집에 입주하고...한 달 넘게 떨어져있다가 친정에 가보니 그 고양이가 옆에서 부비적대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 고양이식 반가움....나도 안다.


2010년에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친구 집에서 약 열흘 간 신세질 때, 알고 지냈던(?) 고양이가 있다. 2009년 11월말까지 11개월간 고양이와 함께 살았을 때 나는 절대 고양이를 침대에 들여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난 처음에는 그 일본 고양이와 거리를 유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일본식의 그 좁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열흘이 막바지로 향할 때쯤 그 고양이는 나와 등을 맞대고 자는 사이가 되었다.


고양이는 오랜 만에 만난 주인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도쿄에 살던 친구는 당시에 수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친구였고, 어릴 때부터 부단히 많은 생물을 키워왔다. 그 친구도 한국 집에 방문할 때면 혹시나...기대를 품지만 고양이는 개 정도의 기억력은 없다고 한다.


2013년 10월, 3년 만에 제주도에서 그 일본 태생 고양이를 다시 만났다. 그 고양이는 유난히 부비적대며 내 주위를 왔다갔다 했다. 나는 그 고양이가 날 반가워한다는 느낌이 왔다. 고양이가 '어라? 너 살아있었냐?' 하며 주위를 뱅뱅 도는 느낌. 하지만 내 친구는 부정. 기억하는 게 아닐 거라고 단칼에 말했지만, 나에겐 왠지 모를 느낌이 있었다.



고양이의 반가움 표시....이것들을 생각하니
단 한 마리 나의 고양이,"탐"군이 생각난다.


인생을 별로 되돌려보고 싶지 않지만
딱 한 순간...
2009년 9월, 2주간 서울에서 휴가를 마치고 스리랑카로 돌아갔을 때 혼자 집에서 기다렸던 우리 고양이가 나를 어떻게 반겼는지...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만나고 싶다. 이상하게 기억이 잘 안난다. 내 친구가 가끔 가서 밥을 주고 가곤 했다지만, 그걸로는 만족을 못 했는지 쥐를 잡아먹고 난리를 쳐놓았던 우리 식'탐'이. 서울에 있는 동안 꿈에도 나왔던 탐.


2주 만의 상봉 순간은 기억 안나고. 며칠 뒤 엄마와 언니가 스리랑카에 도착해서 침실에서 셋이 다 같이 자려고 하는데 유난히 계속 야옹거리던 생각은 난다.

"왜 저렇게 자꾸 울어?"
"니가 오래 자리 비워서 반가워서 그런가 보다."

제자 집에 고양이를 맡겨두고 귀국했는데, 제자는 더 이상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
미안하다.
다시 2009년 9월 그 순간으로 돌아가 꼬옥 안아주고 싶다.

이제 행방이 묘연한 나의 묘연.








끼리밧 외 스리랑카 전통 음식








고작 한국어를 14주 배운 학생 루와니가"선생님, 요리"라면서 선물을 내민다.
요리라는 단어 안 가르쳐준 것 같은데^^

코코넛 밀크로 만든 일명"우유밥"인 끼리밧.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한두 개쯤 먹으면 맛있다^^

성찰과 허세의 중간





요리 중에 도마를 꺼내기 싫어서 버섯을 손에 쥐고 썰다가 손가락 피부를 같이 썰었다.
동사를 다른 단어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단어가 더 어울린다.
썰다.
물론 손가락 자체가 아니라 표피의 일부만이다.




즉시로 상처에서 피가 꿀럭꿀럭 넘쳐나와 버섯에도 스며들고 바닥에도 뚝뚝 떨어졌다. 여태까지 내가 입어본 상처는 찰과상 정도라서 피가 은근히 스며나온 것 뿐이었는데, 이 정도로 피가 철철 흐르는 건 거의 처음 본 듯 하다.

엄마, 언니가 내가 칠칠치 못하게 행동하는 걸 엄청 싫어하기 때문에 티도 못 내고 조용히 내 방으로 와서 고무머리끈으로 상처 아랫부분을 압박했다. 으이그... 대체 커다란 식칼의 칼날이 자기 손을 향하는 방향으로 쥐고 써는 사람이 어디 있니. 이건 남한테 말도 못해. 그래도 생각보다 피는 금방 멈추었고, 상처도 정돈됐다.

통증이 심하지는 않아서 오히려 나쁜 피가 쭉쭉 빠져나가고 순환이 더 잘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손가락 따 듯이.





며칠간 일명 '대일밴드' 라는 것만으로 상처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다 아문 줄 알고 약간 오래 목욕을 했더니, 방에 돌아와서 밴드를 떼자마자 다시 피가 철철 흘러 뚝뚝 떨어진다.
아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방수 기능이 있는 테이프로 교체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이제 피가 스며나오는 일은 없다. 대신 내 왼손 검지의 지문은 바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지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줄이 하나 휙 그어져있다. ㅎㅎ





그랬는데...
오늘 젖은 수건을 쥐고 물을 짜내기 위해 아무 생각없이 힘을 주었는데, 상처 부분이 꽤나 아프다. 입에서 약한 비명이 절로 나왔다. 상처의 겉부분은 이제 모두 붙은 듯 해보였지만, 속에는 아직 상처가 남아있었다.




상처는 이렇게 쉽게 아물지 않나보다.
겉은 멀쩡해보였는데, 생각보다 속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구나.
자극만 주면 튀어나와 아픈 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네.


어쩔 수 없잖아....





소유, 인지, 망각, 보관.....




뭔가 신기하다.


벽장을 열어 8-9년 된 박스를 열면
내 방에 있었는지조차 잊고 있었던 옛날 물건들이 들어있다.
즉, 보관했는지 버렸는지도 까먹고 있었으므로
지금 다시 없어져도 내 인생에 하등의 차이를 안 가져오는 물건들이다.
그것없이도 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또 일단 한 번 보고 나면
버리기가 힘들다.
또 마구마구 사연이 생기고, 추억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 쓰레기 잡동사니가 다시 고스란히 벽장으로 들어간다.
필요성이 완전히 사라진 몇몇 종이쪼가리를 찢어서 버리는 것 외에는.






난 왜 이럴까
왜이리 미련이 많을
왜 미래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과거 생각에만 머물러 있을까.


자책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래도 끌고 가기로 했다.




한 3-4년마다 한번씩 열어보면
3-4년 전에 오늘처럼 똑같이 열어봤다는 사실조차 잊고
또 행복하다. 추억 상자라서...


몇 년 뒤에 또 열어보고
또 행복해하고 또 후회하길 기대하면서
스트레스 그만 받고
그냥 보관하기로 했다.







착각






이미 여러 번 보도되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평범한 통계치(미국 사람이 제일 많이 지은 아기 이름)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신의 경험담을 주절주절 녹여넣어 긴 글로 바꿔낸 한 기사를 읽었다. 그닥 재미있지가 않아서 '기자치고 애매한 필력이네'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글을 받아들이는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한 것인지....그 기사에 누군가 제일 처음에 단 댓글이 짧지만 임팩트가 있다.
"본인이 글 잘 쓰는줄 아는 전형적인 싸이일기 세대 기자님인듯..."

간단한데 뭔가 생각이 많아지는 댓글이다.


'이 기자는 진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을까?' '유행 지난 싸이월드에 여전히 글을 끄적대는 나의 마음 한 켠에도 이런 의식이 숨어있을까?' '어떤 사람이 글을 실제로 잘 쓴다는 것, 자신이 잘 쓴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은 잘 쓰는 거 같은데 남에게 울림이 없는 것, 글을 못 쓴다는 것....이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실제로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어쨌든 이 기자는 나름 이름난 언론사의 타이틀을 달고 주요 포털 메인에 자신의 이름이 박힌 기사를 낼 수 있는 직업을 얻었다. 그 자리에 실제로 걸맞는 실력, 양심, 배려...이런 거 없어도 그 '자리'라는 걸 잡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게 전부인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슬슬 든다.


허풍이 세고, 배려 없는 캐릭터를 보며 "쟤 저러다가 언젠가 거꾸러지지."싶어도, 그냥 그 캐릭터는 아주 잘 살아나간다. '아주 잘 살아나간다'가 중요한 거지, 그 속에 담긴 고결함과 완벽함까지 요구할 필요는 없나보다.


실력이 별로인데 왜 저기 있지? 보다,"저기 있다"라는 게 이미 그 사람의 실력인 듯.       










歲月




옛 생각을 하다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생각났던
화양연화 마지막 장면
看得到, 抓不著

지도 속 나의 집







3-4년 전에 구글 지도로 2009년까지 내가 살았던 집 근처를 더듬어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스트리트뷰는 없었다.

오늘 몇 년 만에 우연히 보니, 스트리트뷰가 생겼다.
2015년 12월 촬영된 것이라고 하니, 그래도 2016년 정도부터는 볼 수 있었을 듯 한데 내가 모르고 있었구나.








골목을 약간 들어가서 뒤편에 어슴푸레 보이는 집이 2년 가까이 내가 살던 집.
반지하와 옥상을 포함하면 거의 4층 규모의 집인데, 집주인이 세입자인 날 버리고(?) 홀랑 이사간 뒤로 몇달간 나혼자 그 큰집에 살기도 했었다.
내가 점유한 2층에만 방 4개와 화장실 2개가 있었고, 옥상 공간과 화장실 1개가 추가로 내 차지였다.
지금 다시 그렇게 살라면 못살 것 같다.
무섭~~.


손가락으로 지도를 살살 움직이며 거리를 돌아보니
새로운 건물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버려진 건물도 많고.
2년 동안 드나든 내 집앞에 저런 건물이 있었나? 싶은 낯선 건물도 있다.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지...


눈감았다가 딱 뜨면
저기에 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 속 진한 녹색 담이 우리집과 옆집의 경계였는데
저 짧은 골목을 걸어나와 입구에 쓰레기봉투를 두고 가면 자동으로 처리가 되었다. 누가 했는지는 모른다. 2009년에 저 곳을 떠났는데, 2015년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그 자리에 봉지들이 뒹굴고 있는 게 신기해서 기억 났다.

더 신기한 건, 곰팡이가 생기거나 못 입게 된 옷/가방류를 내놓으면 정말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집 앞은 바로 큰길이었다) 쓰레기봉투는 그대로 있더라도 의류는 금세 사라졌다. 물건에 애착이 많아 뭔가를 잘 버리지 못하는 내가 포기한 지경의 옷인데도.... 누군가 나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사는 분이 계셨겠지.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여전히 애착을 버리지 못해서 많은 옷을 바리바리 다시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많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저기에 그 옷들 잘 정리해서 놓아두고 왔어야 하는데...
그랬으면 누군가가 훨씬 유용하게 입었을 텐데.


여전히 후회만 많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당신도 이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는, 홍콩 / 심천 국경에서 중국 비자 받기

  서울에서 중국 관광 비자 받는 과정이 무척 귀찮아졌다. 온라인에서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한참 동안 비자 신청서를 완성하고 비자 접수 날짜를 예약하려 하니 예약이 꽉 차 있었고, 보름에 가까운 여유 시간이 필요해서 나의 출국 날짜에 하루 정도가 모...